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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59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I)

차별, 인권이 아닌 믿음의 문제.(야고보서 2:1-13)

by TwoTalents 2023. 8. 27.

 

제목 : 차별, 인권이 아닌 믿음이 문제.

 

본문 : 야고보서 2:1~13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 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 면

4.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 지 아니하셨느냐

6.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말씀 :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장로는 당시 교회 속에서 발생한 심각한 문제 중 하나를 언급한다.

그 문제는 바로 차별이었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과 똑같은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상과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해 버렸다.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판단하면서 그 기준으로 교회의 형제, 자매를 차별했던 것이다.

 

이것이 왜 심각한 문제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원하심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은 고사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라고 하셨는데, 구별되기는커녕 세상과 똑같은 모습으로 죄악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으니깐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야고보 장로는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빠지게 될 때, 어떤 문제들이 일어나는지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먼저 야고보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차별하는 것을 멈추라고 경고한다.

본문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아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사람을 차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앞서 말 한대로 이것은 주님의 뜻을 완전히 반하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보여야 할 모습이 아니다.

 

당시 교회에서 일어났던 심각한 차별은 그 사람이 부자이냐, 가난하냐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었다.

본문 2~4.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교회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해 버렸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오면 그 사람은 부자인 것이고, 좀 남루한 옷을 입고 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부자냐, 가난하냐를 판단하더니, 그 판단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던 것이다.

부자들에 대해서는 존중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 어떤 배려도 없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러한 것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오셨다.

그들을 죄에서 해방하고, 참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을 차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셨는데, 그들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는 말이다.

본문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의 선택을 상기시키고 있다.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선택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에서 부유한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다 악하고, 가난한 자들은 다 선하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선택하신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질된 세속의 가치, 세상의 구조를 뒤집어엎으신 것이다.

창조 질서와 전혀 상관없이 물질과 지위로 인해 일어나는 차별이라는 질서의 파괴를 제자리로 돌리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누가복음 6:20~2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맘몬의 모습으로 오염된 세상의 가치를 온전히 갈아엎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교회가 이런 주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반하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차별하는 것이다.

그러니 야고보는 그러한 모습을 당장 멈추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의 눈에는 교회가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착각하여 헛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았던 것이다.

본문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교회가 주님의 뜻에 반하여, 주가 택하신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겼다.

개역 한글에는 업신여기다모욕하였도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로는 에티마사테’, ‘멸시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교회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모욕하는 것으로 멸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부자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다.

 

야고보는 부자들이 억압할 뿐이라고 전한다.

본문의 억압하다라는 것은 착취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나누어 줄 것 같은가?

그거야말로 한심한 착각이다.

부자들은 절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없는 것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투자이다.

대기업이 펼치는 사회사업도 기업 이미지를 높이고, 자신들의 상품에 좋은 이미지를 부여하여 결과적으로 매출을 올리기 위한 상술이다.

 

오히려 부자들은 사람들을 억압하면서 법정으로 끌고 간다고 말한다.

법정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송사를 벌인다는 말이다.

돈 때문에 믿음의 형제를 상대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법정에서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치의 이익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없고, 자기들만 최대한 많은 이익을 갖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같은 믿음의 형제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는 것이다.

본문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차별하면서 모욕한다는 것은.

그들을 부르시고 이끄시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성경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본문 8, 9.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본문의 말하는 성경은 구약을 말하는 것이다.

레위기 191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마가복음 12:28~31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율법을 따르는 자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라면, 그 말씀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자라면 결코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그렇게 차별하는 것이 범죄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 안에서, 말씀 안에서 당연히 정죄함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한다.

 

야고보 장로는 다시,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본문 10, 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율법을 다 지켜 행하더라도, 누군가를 외모로 차별하게 되면, 그것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과 똑같이 된다는 말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간음하지 않았고, 살인하지 않았어도 차별만으로도 그 모든 계명을 어긴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았다면, 그 말씀을 입으로 말하며 시인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면서 그 시인한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전한다.

본문 12, 13.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믿는 자들에게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도 사랑이 없으신 것처럼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긍휼함이 없다면, 긍휼 없는 심판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긍휼함이 하나님의 심판마저도 이길 수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이는 우리의 긍휼함이 죄인 된 우리를 심판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참된 믿음에는 긍휼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차별은 인권의 문제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인권의 문제만은 아니다.

차별은 우리의 믿음, 우리의 구원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가 과연 주님의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가?

 

본문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이 소개되고 있다.

이는 당시에 가장 심각한 차별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별을 말할 때, 재물에 관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부당한 차별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받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본문처럼 재물 때문에 겪는 차별이 있는가 하면, 실제 외모가 잘생겼냐, 못생겼냐를 따지며 차별을 받기도 한다.

학벌로 인해 차별받기도 하고, 성별, 나이, 지역, 인종, 출신 등등 온갖 이유로 수많은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차별이 야고보 장로의 걱정처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과 똑같은 가치관으로 누군가를 업신여기고, 모욕하며, 멸시하는 것이다.

교묘하게 아닌 척하면서 그러고 있다.

 

한때, 차별금지법 제정 문제 때문에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교단이나 교회에서는 세미나 등을 열어서 성도들에게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기독교 연합회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세미나를 개최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차별금지법 반대 세미나의 강사가 간호사였다.

다른 지역의 세미나에서도 의사나, 간호사 등이 주 강사인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목회자가 메인 강사일 때도 있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어떤 법에 대해 반대하면서 토론을 할 것이면,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거나 그 법과 관련된 이해당사자가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차별금지법을 논하는데, 판사나 변호사같이 법에 관한 전문가를 불러야지, 간호사와 의사, 목사가 왜 주 강사를 하는가?

 

거기다가 그들은 정작 법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강사로 와서 한다는 얘기는 죄다 동성애와 관련된 얘기뿐이다.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면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펼칠 뿐이다.

동성애가 에이즈의 감염 경로라든지, 동성애를 통해 나타나는 육체적, 정신적 부작용이라든지, 성경에서도 죄라고 말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그런 말만 하는 것이다.

그럴 거면 의료세미나나 건강 세미나를 열어야지.

 

그러면서 그와 관련된 보기 힘들 정도의 혐오스러운 영상을 가지고 와서는 그걸 틀어준다.

그렇게 혐오를 조장하고, 모욕주면서 인권을 무시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입으로는 동성애자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겨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말은 그들의 행태를 보면 너무나 티 나는 거짓말일 뿐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동성애자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차별금지법에 관련된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희망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만 차별금지법에 해당되는가?

장애인, 노인, 혼혈인, 어린이, 힘없는 자, 가난한 자 등등.

차별받고 있는 모든 이들이 다 포함되는데 그 사람들 어쩌라는 말인가?

정말 동성애가 문제라면 그에 관련된 특별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해라.

 

지난 19대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로 나왔던 홍준표 후보가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에게 동성애를 찬성하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문재인 후보는 동성애 자체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홍준표 후보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하지 않느냐 그럼 동성애도 찬성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질문하였다.

홍씨가 정말 이해를 하지 못해서 이렇게 질문한 것이라면 논리도 없는 바보이고.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라면 진짜 나쁜 놈이다.

검사 출신이라는 인간이 사기꾼이랑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동성애를 허용하자는 것과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차별받는 사람 중에 속하는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말이 같은 말인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도둑질했다가 붙잡혀서 죗값을 치르고, 사회로 나온 사람에 대해서 취업에 차별을 두지 말자고 주장했다고 하자.

그럼 그 주장이 도둑질을 해도 된다는 주장이 되는가?

성경에서 죄에 대한 용서와 용납을 가르치는데, 그렇다면 성경이 그 죄를 다 저질러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계속해서 세속의 가치관은 따르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원수가 되려고 작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교회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세속의 가치관은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긍휼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부르시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우리 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차별은 분명히 인권의 문제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냐의 문제, 바로 믿음의 문제이다.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차별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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