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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59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I)

내가 하는 말, 곧 나의 믿음.(야고보서 3:1-12)

by TwoTalents 2023. 9. 10.

제목 : 내가 하는 말, 곧 나의 믿음.

 

본문 : 야고보서 3:1~12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 하는 것이라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 대로 운행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 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말씀 : 

야고보서 여덟 번째 말씀.

오늘은 말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나누어보려고 한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은 내가 하는 말, 곧 나의 믿음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말이 많으면 실언이 많다.’

말을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

말이 씨가 된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

 

이 모두가 말에 관련된 속담이나 격언들이다.

이 밖에도 말에 대한 속담이나 경구, 서양 격언은 아주 많이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만큼 잘못 사용하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에 대한 교육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스피치에 관한 강의를 들으며 공부한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이름을 알린 사람 중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에서도 말의 중요성은 너무나도 크다.

일단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 되어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글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성경을 복음의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성경에는 주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인간이 말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이 있다.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 3장도 그러한 가르침 중에 한 부분이다.

야고보서 3장의 첫 번째 단락인 오늘 본문에서는 말의 중요성과 그 위험성,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이의 상태를 함께 전하고 있다.

야고보 장로는 이미 이전 본문을 통해 말뿐인 믿음의 허망함을 이야기했다.

3장에서는 자신의 말을 제어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루게 된다.

그러면서 통제되지 않는 거짓 교사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먼저 야고보는 선생 된 자, 그리고 선생이 되려는 자에게 경고한다.

본문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 당시 선생, 즉 가르치는 자의 위치는 참 매력적인 것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스스로 랍비가 되기를 소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성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기 교회 속에서 가르치는 자, 즉 선생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이 되려고 갈망하는 이들이 많았었다.

그러다 보니 자격이나 능력이 되지 않는 자들이 선생이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다.

야고보 장로는 선생이라는 자리가 중요한 만큼,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많은 말, 특히 누군가를 가르치는 말은 그 말을 한 사람은 물론 듣는 이에게도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선생 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왜 선생 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단 말인가?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말이 많으면 실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실수는 헬라어로 프타이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죄를 짓다’, ‘곁길로 가다등의 뜻을 가진다.

그러니깐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그리고 그 엉뚱한 소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말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말을 제어함으로 자신의 온몸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제외하고 육체를 가진 인간 중에 온전한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죄인이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자기 말을 제어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함에 있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사람이 말을 제어하는 것을 (동물) 말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과 (타는) 배의 키를 조작하는 것에 비교해서 설명한다.

본문 3~5.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야생마를 길들이기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작은 재갈이 그 큰 야생마를 길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으로 인간이 그 말을 탈 수 있도록 해준다.

큰 배도 마찬가지이다.

광풍에 휩싸여 흔들린다고 하여도 키만 제대로 잡고 조정한다면 사공이 원하는 대로 나아갈 수 있다.

야고보는 작은 재갈과 키가 큰 야생마와 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듯이, 작은 혀가 내 몸에, 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작은 혀를 길들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본문 6~8.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를 잘못 놀렸다가는, 그러니깐 말을 잘못했다가는 불이 온 수레바퀴를 불살라버리듯이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트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이 중요하고, 혀가 위험한데.

짐승도 길들이고, 심지어 벌레까지 길들이는 사람이, 정작 자신에게 붙어있는 혀는 도무지 길들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혀를 통해, 말을 통해 끊임없이 악을 말하였고, 끊임없이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과 사람을 저주하는 말이 같이 나오기도 하였다.

본문 9, 10.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자들이 보이는 혀의 이중성, 말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아무런 실천이 없는 것은 너무나도 큰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만큼이나 교회 안에서의 말과 세상 밖에서의 말이 달라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에서는 온갖 미사여구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말씀을 되네 인다.

형제님, 자매님 주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낯 뜨거울 정도로 고백한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쌍욕하고, 누군가를 저주한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막말을 가볍게 시전 해 준다.

이것은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이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이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하고 있을 때는 나의 혀를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있으면 그들처럼 막말하고 다툼을 벌인다고 핑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야고보 장로는 단호하게 말한다.

본문 11, 12.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하나의 샘에서 단물과 쓴 물이 동시에 나올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혹시라도 한 구멍에서 섞이게 되면, 조금 덜 쓴 물이 나오는 것이지, 단물은 나오지 않는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는 것이다.

혹시라도 무화과나무 줄기에 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임 한다고 해서 감람 열매가 맺혀지지는 않는다.

교회에서는 선한 말만 하는데, 밖에만 나가면 악한 말을 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이미 악이 장악했다는 말이다.

예전에 선한 마음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악한 말을 하는 그때는 이미 악한 마음으로 오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만 섬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문제는 종교혼합 주의였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신을 같이 섬겼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에 대해 뭐라고 평가하셨는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제가 설교 중에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한발은 교회 안쪽에 걸쳐있고, 다른 한발은 밖에 걸쳐있다면.

그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밖에 나간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교회 안에서의 말과 교회 밖에서의 말이 동일해야 한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교회를 욕보이지 않는, 자신의 심령을 오염시키지 않는 그런 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삶에서 이게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아가 사랑의 말만, 아름다운 말만, 진리의 말만 완전하게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많이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100% 완전하게 사랑의 말만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실상 이것은 교회 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도 악한 말은 하나도 없고 사랑의 말만 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없다.

정도와 표현의 차이일 뿐 온전하지 못한 인간은 어디에서라도 자신의 혀를 완전히 제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가짜인가?

그럴 수 없다.

 

야고보 장로는 이미 1장에서 이 편지를 읽는 형제, 자매들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야고보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 땅에서 인간이 자신의 혀를 말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겸허한 마음으로 나의 말을 더디 하는 것이다.

나의 말은 더디 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속히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조금씩 나의 말을 통제해 나가는 능력을 끼우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1, 2절을 나누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 말고는 온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말을 완전하게 제어하는 사람도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말고는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했던 것이다.

많은 말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말을 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조심하면서, 더디게 한마디 한마디 전하며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크리스천이라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못된 고백과 섣부른 서원으로 곤란을 겪는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다.

투정 부리듯이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그 말한 것 그대로 이루어져 버리는 순간들을 목격하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너무 가볍게 내뱉는 말이지만, 주님은 그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 것이다.

그 말을 그 사람의 믿음으로 보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말이 우리의 심령을 통해 나오는 내 믿음의 고백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 믿음으로 우리의 입술에서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진리의 고백만이 나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거짓을 고발하며, 약한 자에게 소망을,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죽어가는 자들에게 복음을 말하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고, 온전한 말을 하면서.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람들을 살리는, 세상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말을 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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