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59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I)

위로부터 난 지혜는...(야고보서 3:13-18)

by TwoTalents 2023. 9. 17.

제목 : 위로부터 난 지혜는...

 

본문 : 야고보서 3:13~18

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 :

오늘 본문은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야고보 장로는 위로부터 난 지혜땅 위의 것을 비교하며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오늘 야고보가 전하는 말씀의 주 대상은 선생으로 불리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모든 성도들이 참된 지혜를 분별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야고보 당시 선생이라는 자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일단, 유대교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르치는 자, 즉 교사가 되기 위해 자격이 주어지는 특별한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님께 직접 배운 사도들이 있었고, 그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누군가는 말씀을 배우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배우는 여러 경로가 있을 수 있는데, 공식적인 사역자 학교나 목회자 학교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문제가 무엇일까?

잘못 배운 사람, 검증되지 않은 사람, 가짜 교사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시에는 가짜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신학이 정립된 것도 아니고, 모두가 인정하는 목회자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 경로와 과정을 통해,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하나님이 사역자라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라고,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들 중에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교사들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으로 선생이 된 거짓 교사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교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진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사가 맞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스스로 세워진 가짜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니 분별해야만 하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점을 제시하고 있다.

야고보 장로가 제시한 구분점은 바로 지혜이다.

진짜 교사에게는 진짜 지혜가 있고, 가짜들에게는 가짜 지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각자가 가진 지혜가 있다.

그 지혜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교사라고 말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지혜를 살펴야만 한다.

이것은 배우는 자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야고보 장로는 진짜 교사들에게 드러나는 진짜 지혜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본문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 장로가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라고 질문하는 것은 참된 지혜를 가진 진짜 교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려는 수사법이다.

그러니깐 이 질문을 한 다음에 자기가 답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사적 질문을 한 다음에, 야고보 장로는 진짜 교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밝힌다.

진짜 교사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이 삶에서 행해지고 드러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혜는 당연히 선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기에 악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진짜 교사들은 삶에서 선함이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 선함과 함께 온유함, 즉 지혜의 부드러움이 삶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문의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온유라는 뜻과 겸손의 뜻을 함께 가진다.

그러니깐 하나님의 지혜는 내가 높아지고, 칭송받는 지혜가 아닌 것이다.

내가 똑똑하다고, 하나님께 지혜를 많이 받았다고,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그 지혜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증거되어야 한다.

그게 진짜 지혜이다.

 

이와는 다른 가짜들의 잘못된 지혜에 대해서도 야고보 장로는 설명한다.

본문 14, 15.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먼저 독한 시기다툼을 말한다.

누군가에게 독한 시기가 있으면,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본문의 독한 시기는 나쁜 의미에서의 열정’, ‘열심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열정과 열심이라고 하면 그냥 좋은 말 같다.

하지만 이것이 나쁜 마음에서 사용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지혜에 속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나쁜 의미에서의 열정, 열심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깐 남을 생각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든 말든 자기가 좋으니깐 자기만 열심히 하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운동경기를 하면서 전혀 양보가 없는 것을 자주 본다.

입도 거칠어지고, 반칙도 많이 하면서, 동네 경기를 하는데 마치 국가 대항전인양 이상한 열정을 쏟는 것을 본다.

이런 것들을 승부욕이라고 하면서 좋은 의미에서의 열정적 모습인 양 거짓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너무 집중하고 승부욕이 생기다 보니깐, 본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 평소보다 거친 모습이 나타나고 말았다고 말한다.

여러분, 거짓말이다.

그것 역시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잘못된 열정은 반드시 다툼을 수반하게 된다.

앞서 말 한대로 잘못된 열정은 오직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생각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툼이라는 것은 드러나게 충돌하면서 반대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나에게 있어서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잘못된 열정에 내가 힘들어도 따라야만 할 때가 있다.

이런 것도 보이지 않는 다툼이다.

 

이런 모습을 열정이라고, 승부욕이라고 포장하면서 자랑하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남을 생각지도 않는 자기만의 열정은 결단코 하늘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땅 위의 것이다.

세상의 지혜인 것이다.

세상의 지혜로 남에게 상처를 주든 말든, 그를 밟고 내가 일어서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바라는 것이라면 상대를 향한 배려 없이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정욕을 위한 욕심일 뿐이다.

거기다가 야고보는 이러한 열정을 귀신의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귀신은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고,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귀신의 목적이다.

독한 시기와 그것으로 인한 다툼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이 있을 뿐이다.

본문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독한 시기가 있는 사람들은 욕정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무조건 자기가 이겨야 한다.

내가 주목을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업적을 인정하기가 싫다.

그러니 악한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이기고 싶고 1등을 하고 싶은 욕망에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엄연한 불법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열정으로 포장한다.

이들은 결과가 좋으면, 과정에서의 작은 편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여러분 과정이 불법이라면, 결과는 정당할 수 없다.

 

서울 강남의 사랑의 교회가 불법을 저지르고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러면서 세상 법보다 하나님의 법이 위에 있다면서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하셨다는 코스프레를 했다.

하나님을 범죄자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이런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큰 예배당을 갖고 싶은 욕심에 불법을 주저 없이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거짓말하며 자랑질을 한다.

그 일로 인해 그 교회는 세상과 법적 다툼이 벌어졌다.

이러한 모습이 땅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교회 수련회 기간이나 청년, 청소년 집회에 강사로 자주 세워지는 전문 청소년 사역, 청년 사역자들이 꽤 있다.

그런데 이런 사역자 중에서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눈에 보이는 좋은 결과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합당하다는 마인드로 청소년,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있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모습이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망치는 행위이다.

우리가 이런 가짜 지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위로부터 난 지혜,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한 것임을 가르친다.

본문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하나님으로부터 난 지혜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다.

과정에서의 불법, 편법, 부도덕이 있다면, 결과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지혜일 수 없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난 지혜는 화평한 것이다.

말 그대로 평화롭다는 것이다.

때로는 담대하게 세상과 다투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세상에 불의와 불법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이다.

교회가 불법을 저지르고는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다툼을 벌인다면 그것은 땅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일 뿐이다.

 

또한, 관용을 말한다.

관용은 상대를 향한 배려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기주의와는 반대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잘못된 마음의 열정, 열심은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열정으로 함께 축구하는 사람들 기분 나쁘게 하고, 적당한 반칙을 하며 승리하느니.

그냥 기분 좋게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양순하다.

양순은 양보하는 마음과 함께 합리적인 융통성을 말한다.

융통성은 불법이나 편법과는 다른 개념이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하게 되어 정부에서 모든 대면 예배를 금지시켰다고 하자.

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대면 예배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불법이다.

그런데 2~3명의 스텝과 함께 영상 장비를 준비해서 영상으로 함께 예배한다면 이것은 융통성이다.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긍휼한 마음을 품고 선한 열매를 맺는다.

앞서 말한 관용이 용납의 개념이라면, 긍휼은 용서의 개념이다.

비판은 하되,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나 또한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편견이 없어야 하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내 모습을 가짜로 꾸며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지혜를 평화롭게 실천하는 이들이 참된 지혜를 가진 진짜 교사인 것이다.

본문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평화롭게 삶에서 드러낼 때, 의의 열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말씀의 서두에서 야고보 시대에는 공식적인 사역자 학교나 양성소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짜 교사들이 여러 경로로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은 진짜 교사와 자기 욕심과 세상 지혜로 가득 찬 가짜 교사를 분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현대에는 신학교,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차고 넘친다.

지난 20년간 모든 교단의 성도는 줄고 있는데, 목회자와 신학생은 늘고 있다.

그리고 목회자와 신학생의 학력도 높아지고 있다.

그럼 이제는 당연히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진짜가 대부분이어야 한다.

세상 지혜에 사로 잡인 가짜는 극소수여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실상이 그러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짜들은 더욱 창궐해졌고, 그들이 전하는 세상 지혜는 더 심각해졌다.

똑똑해진 가짜들이 교묘하게 진짜처럼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있다.

그러니깐 이제는 전문적인 학교나 양성소와는 별개의 문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야고보 시대 때 보다 더 조심하고,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서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 지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된 환경에서 세밀한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

그런데 기본적인 구분법은 예나 지금이 똑같다.

성결하지 못하면 가짜이다.

화평하지 못하고 관용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아니다.

양순하면서 긍휼한 마음으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외모에 따라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며, 자신의 모습을 거짓으로 꾸며서는 안 된다.

오직 하늘로부터 받은 지혜를 화평하게 삶에서 실천하는 이가 바로 진짜 지혜를 받은 사람,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기복신앙, 그 기복신앙이 세련되게 변형된 성공신학, 번영신학으로 인해 큰 교회를 이루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면 진짜 주의 종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따지면 통일교도 진짜고, 신천지도 진짜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진짜, 가짜의 구분,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 지혜의 구분은 눈에 보이는 양적 성장, 물질적 성공이 기준일 수 없다.

성결함, 화평과 관용, 양순과 긍휼, 그로 인한 선한 열매.

오직 편견 없는 마음과 거짓 없는 모습이 삶에서 드러나는 지혜야말로 진짜 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도 하나 없이 가족 교회로 예배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 없이, 불법 없이, 불의 없이 끝까지 자신을 지키는 자가 진짜이다.

아첨과 아부로 권력자들에게 빌붙어서, 권모술수로 타인을 짓밟고 높은 곳에 올라서서는, 편법으로 불법으로 자기 부를 축적하면서, 그것을 성공이라고 떠들며, 입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을 외칠 뿐 실제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께 유기당한 가짜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믿음으로 언제나 참된 지혜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이 믿음으로 내가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는 진짜가 될 수 있기를, 사람이교회가 될 수 있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사람이교회'는 온라인교회입니다.

'사람이교회'와 함께하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saramichurch@naver.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