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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과정일 뿐이다.(사도행전 28:1-10)

by TwoTalents 2023. 7. 16.

제목 : 과정일 뿐이다.

 

본문 : 사도행전 28:1~10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 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말씀 :

배를 이용해서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던 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다.

광풍은 2주간 계속 이어졌고, 그로 인해 바울이 탔던 배는 바다 위를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주 만에 배는 마침내 육지에 가까워졌고, 이기적인 사람들로 인해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바울과 함께 배에 타고 있었던 276명의 사람들은 무사히 육지로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가까스로 상륙한 육지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급박한 상황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상륙하게 된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했다.

육지로 완전히 구조된 후에야 그곳이 멜리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문 1, 2.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본문의 멜리데는 오늘날 몰타를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몰타는 지중해의 중앙부인 시칠리아섬, 남쪽에 있는 남유럽의 섬나라이다.

지금은 몰타 공화국으로 불린다.

몰타의 면적은 제주도의 6분의 1 정도로 강화도와 비슷한 아주 작은 나라이다.

 

[몰타까지 여정]

 

다행히 광풍을 만났지만 영 엉뚱한 곳으로 가지는 않았다.

멜리데에 사람들이 상륙했을 때, 그곳의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이 상륙한 그들에게 특별한 동정을 베풀어주었다.

적대적으로 경계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했다는 말이다.

멜리데의 원주민들은 불까지 지피며 사람들이 안정을 취하고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런 때 바울은 그저 있지 않고, 직접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불을 지피는 것을 도왔다.

본문 3, 4.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이것을 바울의 신분이 죄수였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불을 지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자신을 지켰던 바울이 상륙 후에도 여전히 침착한 모습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섬겼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나뭇가지 속에 숨어있던 독사에게 바울이 물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이 부분 때문에 본문에서 말하는 멜리데가 오늘날 몰타와는 다른 곳이거나 아니면 바울이 물린 뱀이 독사가 아니라는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몰타에는 독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억지스럽다.

당시는 주 후 59년 경이다.

그때로부터 지금은 1900년도 더 지났다.

지금 독사가 없다고 해서 그때도 독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 뿐이다.

지금 한국에는 공식적으로 호랑이나 표범 같은 동물은 없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에는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맹수들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지금 없다고 100년 전에 있었던 호랑이와 표범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멜리데의 원주민들이 바울의 손을 물었던 뱀이 독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렇기에 바울은 분명히 독사에게 물린 것이 맞다고 봐야 한다.

 

멜리데의 원주민들은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 것 때문에 그가 매우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바울이 비록 풍랑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그가 살인자와 같은 흉악범이기 때문에 공의의 신이 바울에게 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이 이런 관점은 지극히 이교도적 관점이다.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죄를 지은 바울이 끝내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교도적인 사상, 인과응보 사상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널리 퍼져있다.

일의 결과를 놓고 그 사람의 믿음을 옳다 그르다 평가하는 것이다.

성도의 사업이 잘되면 주일 잘 지키고, 십일조 도둑질 안 해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기도하지 않고, 감사헌금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사기를 친다.

제가 39살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배우자를 놓고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까지 들었다.

어떤 성도님은 암에 걸린 상태에서 부흥회에 참석했더니, 부흥사가 한다는 말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않아서 벌 받는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니깐 기독교의 인과응보는 선한 일, 의로운 일도 아니고, 교회 빠짐없이 잘 다니고, 헌금 십일조 빼먹지 않고, 목회자 열심히 잘 섬기는 것으로 복을 받게 된다는 변질된 인과응보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구원은 인과응보와는 상관이 없다.

원래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생, 현세, 내세가 반복되는 윤회 사상과 연관된다.

그러니깐 창조와 심판을 말하는 기독교와는 맞지 않는 사상이다.

불교적으로 생각지 않고 단순히 현세적으로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신앙과는 다른 주장이다.
기독교는 내가 착한 일을 하면서 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 잘 내고 목회자에게 잘하는 것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다.

기독교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하였기에 구원이 이루어진다.

인과응보에 관해서는 나중에 결론 부분에서 다시 나누도록 하겠다.

 

어쨌든 독사에게 물렸지만 당장은 바울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바울이 이제 곧 죽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본문 5, 6.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당장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지만, 곧 독의 기운으로 손이 부어오르고 쓰러져 죽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바울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이렇게 되자 원주민들이 이제 바울이 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독사에게 물리면 죽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 죽지 않으니깐 보통 사람이 아니고 신일 것이라는 말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살인자에서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 역시 이교도적 사상일 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영적 무지함일 뿐이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 바울은 멜리데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멜리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에게 초청되어 영접을 받는다.

본문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멜리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보블리오의 정확한 직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가장 가까운 시칠리아의 총독에게 임명된 관리로 멜리데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그가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대접했던 것이다.

여기서 좀 이상한 것은 바울이 보블리오나 멜리데의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그래서 어떤 이는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따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의 성정상 그럴 경우는 희박하다.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정황상 바울은 멜리데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 8~10.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보블리오의 집에서 영접받는 동안 바울은 열병과 이질에 걸렸던 보블리오 부친의 병을 낫게 한다.

그리고 이 소문으로 인해 다른 병자들이 몰려왔고, 그들의 병도 고쳐주었다.

이 과정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당연히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낫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치유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밝혔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석 달 후에 바울 일행이 떠날 때 보여준 원주민들의 모습이 방증해 준다.

멜리도의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떠날 때 항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배에 실어 주었다.

식수와 식량, 기타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준 것이다.

276명의 사람이 500km 이상 떨어진 로마까지 무사히 가려면 상당히 많은 물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을 다 채워준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나그네를 대접하겠다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신들의 병을 치료한 준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한 깨달음이 있었기에 이렇게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재난으로 인한 위기 후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다.

 

말씀 마무리.

앞서서 인과응보에 대해 나누었다.

인과응보는 현상 하나하나를 결과로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에는 반드시 그 결과에 맞는 원인이 있다.

결과가 좋으면 선한 삶으로 덕을 쌓은 것이고, 결과가 나쁘면 악한 일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바울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가는 곳마다 공격받고 모함을 당해야만 했다.

두들겨 맞기도 하고, 도망도 쳐야 했다.

풍랑으로 거의 죽을 뻔했으며, 간신히 살았는데 독사에게 물리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고난이 반복되는 바울의 사역을 인과응보로 어떻게 해석한단 말인가?

바울이 고난을 당해야 할 정도로 믿음이 엉망이었는가?

바울뿐만 아니다.

예수님의 삶은 어떠한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의 말씀을 인과응보로 이해할 수 있는가?

인과응보대로 한다면, 결국 사형당하는 바울,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철저한 실패자이며, 그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현상 하나하나를 결과로 보지 않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모든 것을 결론 내리고 판단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은 과정일 뿐이다.

최종 결과, 마지막 목적을 위해 진행되는 과정일 뿐이다.

최종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그날, 그때 드러나게 된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그때 내 삶의 결과가 드러나는 것이다.

 

바울이 만난 풍랑은 그가 믿음이 엉망이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니다.

올바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후에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도 최종 결과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최선을 다하면서 결국 주님 앞에 서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계속해서 실패하고 나에게 반복적으로 고난이 닥치는 것은 내가 십일조를 내지 않아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벌을 받는 결과가 아니다.

실패와 고난 중에도 주님의 뜻을 찾고, 나를 지켜 멈추지 않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나타나는 축복이나 고난, 성공이나 실패의 현상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믿음 안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이냐이다.

 

바울은 자신이 쓴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후서 416, 17.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실패든 성공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이 세상에서의 현상은 경한 것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만이 중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베드로도 이렇게 고백한다.

베드로전서 412, 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 땅에서의 시험과 고난을 오히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은 주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11, 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실패하고 박해받는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기뻐하라고 가르치신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질 마지막 결과, 하늘에서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우리는 연약하여서 그러한 감정을 당장은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우리의 결과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말씀을 의지하며 모든 세속의 현상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

아니 나아갈 수 있다.

함께하신다고, 인도하신다고, 그 어떤 것도 나를 잡으신 당신의 손을 끊을 수 없다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믿으며 오늘도 모든 세상의 현상 속에서도 나를 지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실패와 고난, 슬픔과 어려움은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뿐임을 기억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 공동체 여러분.

사람이교회가 오늘 2주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여전히 초라하고 연약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교회의 과정일 뿐이다.

사람이교회는 교회의 부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사람이교회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오늘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내일 어떤 실패를 하든지.

어떤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교회 됨을 지켜나가는 것을 소망한다.

3주년 때도, 4주년 때도 오늘과 다르지 않은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이교회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을 지나, 결국 하나님과 함께하는 결과를 맞이하는 사람이교회이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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