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하나님의 함께하심, 바울의 확신.(사도행전 27:1-26)

by TwoTalents 2023. 7. 16.

 

제목 : 하나님의 함께하심, 바울의 확신.

 

본문 : 사도행전 27:1~26

1.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4.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 북을 향하였더라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 느니라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말씀 :

드디어 로마를 향한 바울의 여정이 시작된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수감되고 2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학자들이 이때를 주 후 5910월경으로 보고 있다.

당시 가이사랴에서 로마를 향한 이동 수단은 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중해에서는 1년 중에 9월에서 10월까지는 항해가 너무 어렵고, 11월에서 다음 해 3월까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항해는 시작된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로마로 압송되는 바울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본문 1~3.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바울은 혼자 로마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아구스도대라는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 법정에 서야 하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이송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바울에게는 적어도 2명 이상의 믿음의 형제가 동행하게 된다.

지금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와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가 그들이다.

바울은 죄인으로 로마 법정에 서기 위해서 이송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동료가 함께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놓고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누가와 아리스다고도 바울과 같은 죄수의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로마에서 재판받기 위해 함께 이송되었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로마 시민인 바울이 받은 특권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죄수이긴 하지만 유다 총독은 물론 지금 이송을 담당하고 있는 로마 백부장 율리오에게까지 호의를 받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비록 죄수이지만 그의 동료들이 함께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어느 주장이 맞든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든지, 중요한 것은 바울은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가고 있는 로마를 향한 길은 믿음의 형제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이사랴를 떠난 바울 일행은 먼저 하루 만에 112km 떨어진 시돈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항해에 별문제가 없다.

그런데 시돈을 떠나 항해를 이어가는 중에 어려움에 닥치게 된다.

본문 4~6.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항해해야 할 방향과 다르게 맞바람이 불고 만 것이다.

그래서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구브로 해안을 통해 조심스럽게 루기아의 무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려움은 있었지만,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무라에서 바울 일행은 배를 갈아타게 된다.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일일 것이다.

바울 일행이 갈아탔던 알렉산드리아라는 배는 애굽에서 로마까지 곡식을 싣고 나르는 곡물선이었다.

당시에는 애굽이 로마의 곡물을 담당하는 주요 곡창 지대였다.

그래서 로마 정부와 개인 선박이 계약을 맺고 애굽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송했었다.

이때 곡물만 운송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용하는 여객선이기도 했으며, 바울과 같이 로마로 가는 죄수들을 이송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배를 갈아타고 다시 항해가 시작되었는데, 항해가 점점 어려워졌다.

본문 7, 8.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에는 바람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런데 이때 바람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항해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무라에서 니도까지는 약 223km 거리로 순풍만 탄다면 이틀 만에도 도착이 가능했었다.

그런데 배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근처에 오게 되었다.

그마저도 바람이 좋지 않아서 니도에 정박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또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바울을 태운 배는 니도를 지나 간신히 미항이라는 곳에 정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계속 바람의 상태가 좋지 못했던 모양이다.

바울을 태운 배는 출발을 하지 못하고 여러 날을 미항에 머물러 있게 된다.

본문 9, 10.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말씀의 서두에서 오늘 본문의 항해를 주 후 5910월경으로 본다고 했다.

그래서 본문의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인들의 대 속죄일로 본다.

대 속죄일은 유대력으로 티쉬리 월 10일에 지켰던 절기이다.

유대력 티쉬리 월은 태양력으로 9~10월경이다.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누가도 금식하는 절기, 즉 대 속죄일이 지난 10월경의 항해가 아주 위태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미항에서의 출항이 늦어지면서 백부장도, 선장과 선주도 초조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은 서둘러 배를 띄우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울이 당장 미항을 떠나 항해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나선 것이다.

바울은 여러 번의 선교 여행을 통해 이 지역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바울의 주장은 경험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예언이나 성령의 깨달음으로 격상시킬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본문에서 전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가려지지도 않는다.

 

어쨌든 출항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백부장의 판단은 바울의 그것과 달랐다.

본문 11, 12.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한 것이다.

미항은 겨울에 유독 추웠다고 한다.

겨울을 보내기에 너무 불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미항에서 65Km 정도 떨어진 뵈닉스라는 곳으로 옮겨가자고 말한다.

뵈닉스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지형 조건으로 겨울나기가 수월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 역시 너무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당시 상황에서는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몇 번 항해의 경험이 있다고 해서 비전문가인 죄수의 말을 무작정 들을 수는 없다.

실제 필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전문가인 선장의 말을 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만 놓고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러면서 마치 이것을 전문가 말보다 목회자의 말을 먼저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이다.

 

어쨌든 처음에는 전문가들의 말이 맞는 듯했다.

본문 13~15.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처음에는 남풍이 잘 불어서 순항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북동풍이 불면서 배를 조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본문에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었다고 말한다.

유라굴로동풍을 뜻하는 헬라어 유로스북풍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낄로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깐 동북풍’, 혹은 북동풍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 바람은 광풍, 미친바람이라고 표현할 만큼 항해가 불가능한 바람인 것이다.

 

유라굴로라는 미친바람에 의해 바울이 탄 배는 꽤 먼 곳까지 떠밀려 갔다.

본문 16~19.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배를 조종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풍랑에 밀려 내려가다가 가우다라는 섬 아래로 지나게 된 것이다.

이때 가우다 섬이 바람막이가 되어 풍랑이 잠시 약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루를 끌어올리고 선체를 줄로 두르는 등 사람들은 배를 재정비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광풍은 약해지지 않았고 계속 거세게 불었기 때문이다.

배는 점점 위험해져 갔다.

그래서 이제는 배를 가볍게 하려고 실었던 짐을 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배의 출렁거림은 잦아들지 않는다.

급기야 배에서 사용해야 할 기구들마저 내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날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본문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풍랑은 여전히 거칠고, 구름으로 인해 해와 별도 보이지 않는다.

방향을 알 수 없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쯤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고, 그저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런 중에, 모두가 절망 가운데 빠졌을 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나선다.

본문 21, 22.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은 미항에서 전했던 자신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에게 출항을 반대했던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난 일을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들춰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말이 신뢰할만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그것으로 이제 할 말에 대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려 함이다.

그런 다음에 어느 누구의 생명도 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말은 주관적인, 자신이 임의로 한 말이 아니었다.

본문 23, 24.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의 선포는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전한 것이 아니다.

위기의 사람들에게 어설프게 희망을 주려 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명확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그러니깐 바울의 위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힘들어하거나 불행이 닥친 성도를 보면 어떻게든 위로하고 힘을 주려는 마음이 앞서는 것을 보게 된다.

믿음의 형제, 자매이기에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 형제에게 위로가 되는지, 아니면 내가 힘들어하는 형제를 위로했다는 자기만족인지를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떤 때는 위로가 되기는커녕 또 다른 상처가 될 때가 많이 있다.

어설프게.

기도가 부족해서라느니, 믿음이 없어서라느니, 의심해서 그렇다느니.

그러니 더 열심히 기도하라느니, 예배에 더 열심히 나와야 한다느니, 교회 봉사 하나 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느니, 성경 말씀 읽은 시간을 늘리라느니.

이러면서 자기 마음대로 제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진단과 처방까지 내려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가 그 사람이 기도 안 하는 것을 봤는가?

그 사람 믿음이 큰지 작은지 무슨 기준으로 평가하는가?

알고 보면 어쭙잖게 위로하는 당신보다 훨씬 더 많이 봉사하고, 훨씬 더 많이 예배에 열심인 경우도 있다.

실제 문제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들을 믿음이네 영적이네 하면서 자기 맘대로 떠들어 대는 것이다.

이런 어설픈 위로라면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상대방의 어려움에 대해서 나는 겸손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잠깐 입을 닫고 말하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다.

그저 슬퍼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의 말을 들으며 그와 함께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본문의 바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질 때, 그때 나의 위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될 수 있도록 도우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주장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받은 분명하고 확실한 주님의 말씀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너무나도 당당하고 자신 있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 25, 26.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 말씀 그대로 될 것임을 믿음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까지 제시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그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을 온전히 전했던 것이다.

 

말씀 마무리...

가이사랴에서 시작된 로마를 향한 바울의 여정은 처음부터 삐걱대었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없었고, 미친 바람과 거친 파도가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그저 힘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이 어렵게만 되는 것을 볼 때 바울의 이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로마를 향하는 바울의 비전은 자기 생각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모든 이들이 희망을 잃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바울과 함께하셨다.

갑자기 항해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도우시거나,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해주신 다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어려움 중에, 힘든 중에, 희망을 잃은 중에 그런 중에 당신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만을 드러내셨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위기 속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소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 공동체 여러분.

때로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을 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일의 진행이 순조롭느냐? 그렇지 않느냐? 를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기준으로 말씀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기에 더 많은 방해가 주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기 때문에 더 많은 공격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반드시 이루시려는 역사이기에 어제도 실패했고, 오늘도 실패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정한 성공은 수많은 방해, 끊임없는 공격, 반복되는 실패가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를 통한 하나님의 원하심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확실한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내가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하심을 나타내 주실 것이다.

지금 내 앞의 고난은 그저 지나가는 현상에 지나가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끝내 이루어질 놀라운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가?

 

오늘도 주님의 함께하심을 확신하며.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찾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슬픔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고통 속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느끼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광풍이 불어 우리의 앞길을 방해해도 주님과 함께함으로 승리하는 우리 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사람이교회'는 온라인교회입니다.

'사람이교회'와 함께하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saramichurch@naver.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