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죄수 바울, 복음 전파의 기회를 얻다.(사도행전 25:13-27)

by TwoTalents 2023. 7. 16.

제목 : 죄수 바울, 복음 전파의 기회를 얻다.

 

본문 : 사도행전 25:13~27

13.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 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말씀 :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하게 된다.

고발의 내용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거짓 주장이었기 때문에 이에 관한 명확한 증거도, 증인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누명은 금방 벗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바울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로 이동하며 로마 천부장, 총독 벨릭스, 그리고 신임 총독 베스도에 이르기까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재판을 받아야만 했었다.

시간이 지나도 바울을 고발했던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바울은 그대로 누명을 쓴 채 죽을 수는 없는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결론 나지 않은 지루한 재판이 이어졌던 것이다.

결국 신임 총독 베스도의 주관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재판에서 로마 시민인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것으로 지루한 바울의 재판은 일단락되었다.

이제는 예루살렘이나 가이사랴가 아닌, 로마로 가서 로마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다투게 된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바울이 로마로 보내지는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발생한 내용이다.

여전히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렸던 왕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오늘은 이 부분을 살펴보고 나누려고 한다.

본문 13, 14.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신임 총독 베스도는 부임하자마자 유대인들의 요구로 바울의 재판을 주관했었다.

본문은 그 재판이 끝나고 수일 후를 말하는 것이다.

새롭게 부임한 총독에게 당시 팔레스타인 북부지역의 왕이었던 아그립바가 인사를 온 것이다.

본문의 아그립바 왕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2세를 말한다.

아그립바 2세는 헤롯가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리고 함께 온 버니게는 아그립바의 여동생으로 이 두 사람은 근친상간의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 황제는 아그립바에게 팔레스타인 북부를 다스리게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스릴 권세도 주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임명하고 해임할 권한까지 주었다.

총독 베스도는 아마도 이런 이유로 아그립바에게 바울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성전, 그리고 대제사장과 관계 깊은 아그립바에게 도움을 얻고자 한 것이다.

 

베스도는 바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본문 15, 16.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바울을 고소한 자들이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음을 다시 한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바울을 고소하면서 잘잘못을 따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막무가내로 바울의 유죄를 주장하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베스도는 그들의 억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소당한 바울에게 당연히 변호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 로마법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베스도는 로마법에 따라 재판을 진행했음을 밝힌다.

본문 17~19.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도 난리를 부리니깐 베스도는 바울이 엄청난 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막상 재판을 열어보니 악행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신봉하는 로마법에 저촉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유대인들의 종교와 관련된 문제가 다였다.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황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의 나라 종교에 관한 것이니 베스도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본문 20~22.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남의 나라 종교에 관한 일이니 어떻게 심리하고 판결 내려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받는 것이 어떨지 물어보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9절의 기록과는 다르다.

259절에는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 베스도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수도 있고.

아니면 실제로 자신이 판단하기 어려우니깐,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서 종교 지도자들이 판단하게 하고.

그것으로 그들의 환심도 사려고 했었을 수 있다.

어쨌든 온전히 바울의 편은 없는 상태였다.

그런 중에 예루살렘행을 권유받은 바울은 곧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는 것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베스도가 바울을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데리고 있음을 아그립바에게 말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듣기 원했고, 베스도가 이를 허락하게 된다.

 

다음날이 되어서 아그립바는 바울을 만나기 위해 접견 장소에 들어섰다.

본문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며 화려한 치장으로 위엄있게 접견장에 등장하였다.

이에 반해 바울은 죄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그는 두 손에 쇠고랑을 찼거나, 포승줄에 묶인 상태였을 것이다.

아그립바와 바울이 등장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참으로 재미있다.

그 누구보다 화려했을 아그립바와 그 누구보다 초라했을 바울이 대조된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자와 가장 힘없는 자의 만남이다.

마치 사자와 토끼의 만남과도 같은 모양이다.

 

그런데 정착 생명의 비밀은 화려하고 힘 있는 아그립바가 아닌, 초라하고 힘없었던 바울에게 있었다.

아마 아그립바는 자신의 권력, 그리고 베스도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바울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참된 생명은 아그립바가 아닌 바울에게 있었다.

아그립바는 자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이제 바울이 전하게 될 복음, 그 놀라운 그리스도의 도를 듣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그립바와 바울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영적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다 모이고 베스도는 다시 한번 바울의 재판에 관해 설명한다.

본문 24, 25.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베스도는 자신이 합당하게 잘 살펴서 바울이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 말은 큰 틀에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론적이다.

만약 바울이 로마 시민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래서 황제에게 상소하지 못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바울은 벌써 예루살렘으로 강제 이송되어 그곳에서 불리한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소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바람대로 흉악범이 되어 벌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 베스도에게 오기도 전에 천부장이나, 벨릭스의 선에서 재판은 불의하게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바울의 재판에 관여했던 사람들, 그러니깐 로마 천부장이나 벨릭스, 그리고 베스도까지 이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원하는 판결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베스도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을 로마로까지 이송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냥 사람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본문 26, 27.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에 그에 관한 보고서를 서면으로 작성하여 함께 보내야만 했다.

바울이 어떤 죄명으로, 누구에게 고발당하였는지, 재판을 주관한 베스도 자신은 이 고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등을 보고해야 한다.

그런데 보고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 바울이 고소당한 내용은 로마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의 종교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유대 지도자들이 악을 쓰며 고발했지만.

정작 명확한 증거도 확실한 증인도 없었다.

그래서 아그립바에게 도움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재판은 이미 끝났다.

판결 없이 로마 법정으로 사건은 이관될 것이다.

그렇기에 아그립바에게 어떤 판결의 근거를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재판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쓰면 좋을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본문 내용이다.

이후에는 아그립바가 베스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바울의 변명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때 바울은 자신을 변호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된다.

 

바울은 이제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항상 대척점에 있었던 헤롯가의 마지막 왕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죄수의 신분으로 헤롯 안디바 앞에 섰고 그에게 말씀을 선포했다.

사도 야고보도 죄인으로 헤롯 아그립바 1세 앞에 섰고,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바울 역시 죄수이기에 팔레스타인 북부의 왕인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본문으로 가이사에게 상소하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었다.

그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다면, 그의 신분이 죄수면 어떻고, 왕이라 한들 뭐가 다르겠는가?”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바울이 죄수였기 때문에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을 알게 된다.

만약 그가 평범한 신분으로 있었다면, 아그립바 왕과의 만남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발당하고, 죄수의 신분이 되었기에 오히려 아그립바가 자진해서 바울의 말을 듣겠다고 나서게 된 것이다.

 

그냥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바울은 참으로 암울한 상황이다.

아무 죄도 없이 모함당해서는 몇 년을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런데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제 로마 군인의 도움을 받아 가장 안전하게 그토록 소망했던 로마로 가게 될 것이다.

거기다가 로마로 가기 전에 일상에서 만나 보지도 못했을 아그립바 왕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복음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의 어려운 상황이 바울을 실패하도록 했는가?

그를 슬프게 했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음 전파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로마를 향한 소명을 안전하게 이룰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 공동체 여러분.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 암울한 그 상황이 나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오늘의 어려움이 반드시 내일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암울함도, 어려움도, 고통도, 고난도 그저 삶의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가나안을 가는 여정 중에 어려움과 아픔이 있다고 해서, 가나안 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아픔이 있어도 가나안은 그 자리, 그곳에 여전히 존재한다.

광야에서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말씀에 순종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면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 나에게 주어질 것이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의 여정을 걷는 나에게, 우리에게 역전의 은혜를 허락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죄수가 된 나의 현실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이 복음을 전하는 나의 소명을 이루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교회 신앙 공동체이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사람이교회'는 온라인교회입니다.

'사람이교회'와 함께하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saramichurch@naver.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