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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구약)/01 창세기 묵상(I)

의외로 싱거운 결말.(창세기 33:1-20)

by TwoTalents 2023. 3. 18.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의외로 싱거운 결말.

 

본문 : 창세기 33:1~20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묵상 :

드디어 야곱과 에서는 만나게 된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면서까지 간구하고 응답을 받았지만, 여전히 야곱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야곱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네 명의 아내와 12명의 아들, 딸이 있다.

그래서 무리를 세 떼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진행하게 한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이 가장 앞서서 형, 에서를 맞이하게 된다.

본문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야곱은 더 이상 뒤로 숨지 않는다.

아니 숨을 곳이 없다.

그는 가장 앞서 나아가 형, 에서를 향해 일곱 번 절하는 것으로 최고의 예우를 전하게 된다.

이런 야곱을 향한 에서의 반응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본문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에서는 야곱을 반갑게 끌어안을 뿐만 아니라 입을 맞추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야곱은 두려웠고, 형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다가 다리마저 절게 되는 난리를 부렸었다.

그런데 막상 형, 에서는 눈물로서 동생과의 재회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의 예상과는 달리 에서가 왜 이렇게 동생과 재회를 기뻐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야곱이 형에게 바칠 예물을 먼저 보내는 전략을 세웠고, 거기다가 목숨을 건 간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눈같이 녹게 만드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문의 전체 흐름을 보면, 에서는 애초부터 야곱을 해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던 것이 벌써 20여 년도 더 된 일이다.

그 일로 야곱은 고향을 떠나버렸다.

야곱이 없는 곳에서 에서는 자연스레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형을 위해 예물을 준비한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본문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에서는 동생의 예물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다.

물론 당시 근동의 문화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예물에 대해 처음에는 사양하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에서는 분명히 현재 자신에게 있는 소유가 족하다고 말하고 있다.

동생이 없는 집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에서는 경제적 활동도 잘 풀려서 재물도 많이 모아서 부자로서 잘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지금 에서를 따라 온 사람들이 장정만 400명이다.

그렇다면 집에 남아있는 가솔까지 합치면 에서가 거느린 사람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에서는 동생이 없는 곳에서 평안하게 잘 먹고, 잘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2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자연스레 동생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어쩌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던 야곱이 스스로 자책하여서 그 긴 시간을 혼자만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에서는 처음에야 동생에게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 때문에 도망가버린 동생이 불쌍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고 싶기도 하고 했던 것은 아닐까?

형은 고향에서 부모님들과 잘 먹고 잘사는데, 야곱은 자기 혼자 괴로워서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사기꾼 삼촌 밑에서 고생만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았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야곱 스스로가 자신을 괴롭혔던 죄책감, 그것으로 인한 두려움.

그것이 극복되지 않는 이상, , 에서가 용서하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어도, 그 사실을 모르는 야곱은 형에게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을 통해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그것으로 형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갖게 얻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결국 야곱의 바람대로 형, 에서와의 화해는 잘 이루어졌다.

그것이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 것이든지, 아니면 야곱의 쓸데없는 걱정을 없어지게 하셨든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은 분명하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이 했든 서원들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응답하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간절하게 간구했던 일들이 너무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걱정된 마음에 잠도 설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는데...

도대체 걱정을 왜 한 것인지 한심할 정도로 간단하게 일 처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한 것이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면 자기 불안에 의한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때로는 죄책감 때문에 혼자 움츠려 들때도 있었다.

상대는 기억도 못하고 있는데, 행여 그 사람과 마주치면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나 조바심을 가질 때도 있었다.

막상 용기를 내어 그에게 사과하면, 그 사람은 자신이 그 정도 일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님을 밝힌다.

그렇게 나는 작은 일에 집착하는 속 좁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윤동주의 서시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래서인가?

작은 잘못에도 너무나 크게 괴로워하는 나를 발견 할 때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으로 죄에 민감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다.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없다.

알고서도, 모르고서도 잘못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저지를 잘못을 괴로워하고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나의 죄를 괴로워하고 슬퍼해야 하지만...

반드시 회개하고 회복되어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또 실수하면, 또 괴로워하다가, 다시 회개하고 회복해서 지난번보다 더 열심히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결코, 죄의 노예가 되어 죄책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실패자처럼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이 아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내 모든 죄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스러져도 일어나고, 넘어져도 일어나고, 자빠져도 일어나는 내가 될 수 있기를...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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