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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7 절기

[종교개혁주일] 비판합시다.(마태복음 7:1-5)

by TwoTalents 2022. 11. 2.

제목 : 비판합시다.

 

본문 : 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말씀 :

오늘 본문은 비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가지고 많은 목회자들이 비판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설교한다.

그러면서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매우 죄악 된 행동인 것처럼 말씀을 전한다.

정말 그런 건가?

그것이 정말 저주받을 행위인가?

그런데 참 재미난 것은…….

남을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몹시 나쁜 행동이라고 설교하시는 그분들이, 누구보다도 상대를 향한 비판을 많이들 한다는 사실이다.

설교 시간에 복음을 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다른 정치인 욕하다가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자기 말 안 듣는 성도를 야단치듯이 비난한다.

다른 교회 목회자 욕하고, 타 종교 욕하고, 타 교단 욕하고…….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비판은 그저 욕이고, 자신이 하는 비판은 진리의 말씀인가?

웃기는 소리다.

 

그렇다면 정말로 남을 비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 부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본문 1절 말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1절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무작정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너 자신이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대와 같이 SNS가 활발한 시대에는 누구라도 내 의견을 비판하는 것에 대한 내성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세상에는 수없이 다양한 주장들이 존재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SNS를 통해 바로바로 드러나고 표출된다.

어떤 때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향해 공격도 하고, 상대방의 공격에 대해 방어도 하는 것이 현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되어있다.

모든 사람이 내 말에 동조할 수 없고, 나 또한 타인의 의견에 무작정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인터넷상에서 비판도 생기고 그것이 심하면 비난과 욕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페이스북이나 트윗을 통해 남의 의견이나 생각, 행위에 대해 비판을 했다고 하자.

그런 그가 남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싫어하고, 자신에게 악성 댓글 달았다고 고소하고 한다면 그것이 정당한 모습인가?

극심한 이기주의적인 모습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악성 댓글 다는 것 자체가 싫다면, 자기도 악성 댓글을 달지 말아야 한다.

지는 악성 댓글 달면서 스트레스 다 풀고, 남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남들의 악성 댓글, 자신을 향한 비판이 싫다면, 자신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본문 1절의 말씀을 단순히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결단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봤을 때, 그저 모른 채 눈감아 주라는 얘기가 아니다.

거짓과 진실이 있을 때 우리는 반드시 진실, 진리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이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는 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깐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을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비판에서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비판하는 자의 교만이다.

비판을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은연중에 자기 의를 나타내고, 자기의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 마음속에 깔린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하면 그래도 나는 너보다 나은 존재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마음인가?

교만이다.

우리는 이런 교만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실제로 산상수훈으로 분류되는 본문의 말씀은 당시의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

자신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랍비들을 빗대어서 주시는 교훈이다.

그러니깐 엉터리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교만하게 남을 정죄하는 역할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죄는 하나님이 하는 역할이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랍비들은 정죄하는 것으로 타인의 죄를 판결하면서 동시의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 하였다.

내가 의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남을 정죄하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하여 누가 누굴 판단할 수 있는가?

NIV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Do not judge”라고 되어있다.

‘Judge’의 뜻이 무엇인가?

판단하다’, ‘판결하다’, ‘평가하다’, ‘심판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명사로는 판사이다.

판사가 하는 일은 죄에 대한 형을 확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누군가의 죄에 대하여 형을 확정 지을 권한이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죄하면서 형벌을 확정 지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런데, 인간의 교만이 배제된 상태에서라면, 무작정 비평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당연히 선과 악을 날카롭게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7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분명히 판단하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판단이라는 단어는 본문의 비판이란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두 판단의 전제 조건이 전혀 다르다.

오늘 본문에서의 판단은 남을 정죄하는 나의 교만에 의한 판단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의 판단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판단인 것이다.

나의 교만에 의한 판단은 좋지 못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그 판단이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본문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비판하고 헤아린 그대로 내가 비판받고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의 판단은, 그 전제가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판단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판단은 다르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에 의해 판단하고, 사랑으로 치유하기 위해 비판한다.

하지만 내 교만에 의한 판단은 사랑이 전제된 것이 아니다.

미움 때문에, 혹은 증오심과 정죄함으로 남을 비판한다.

내가 높아지고자 남을 깔아뭉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비판은 그 모습 그대로 나에게 적용되어 내가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기준에 사랑이 없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판단이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것인지, 나의 교만에 의한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남을 보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보아야 알 수 있다.

본문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무슨 말인가?

남의 잘못만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내 행동에, 내 삶에, 내 결정에 엄청난 잘못이 있는데…….

그것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들의 작은 잘못에 시비를 걸고 비판을 하는 것이다.

자기 행동에 대한 완벽한 너그러움이, 자기의 잘못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교만의 극치이다.

어떻게 사람이 일 점의 실수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언제라도 내가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고, 잘못 판단하고, 잘못 결정 내릴 수 있다는 전제를 두어야 한다.

그래야 계속적으로 나를 돌아보고, 내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할지 스스로 겸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그 교만함으로 남을 판단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 판단을 행동으로 옮기려고까지 한다.

본문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자신의 교만으로 남을 판단하는 자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자기 눈 속에 들보가 들어간 것 같은 큰 잘못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교만으로 꽉 차 있는데.

그런데도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와 같은 잘못을 자신으로 하여금 고치게 하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웃기는 소리인가?

살인강도를 저지른 인간이 단순 절도범을 자기가 교화시켜주겠다는 말이랑 똑같은 소리다.

근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고 있다.

사실 자기에게 고쳐야 할 큰 잘못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눈에 있는 조그마한 잘못, 그것만 비판하고 거기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면서 사랑이라 거짓말하며 참견하고, 관심이라 사기 치며 간섭한다.

마치 정말 자신이 타인의 눈 속에 티를 빼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자신에게만은 너그럽고, 남에게는 까다로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결단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이런 교만한 자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신다.

본문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교만한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외식이란 말은 헬라어로 휘포크리테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무대에서 연기하는 연기자를 뜻한다.

그러니깐, 지금 교만한 자들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룩한 척, 착한 척, 신령한 척, 깨끗한 척.

그들의 삶은 가짜이다.

참이 아니고 거짓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거짓된 연기를 하는 이들을 향하여 남들 보고 이래라저래라하지 말고,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먼저 자기의 큰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것이다.

지금 큰 칼이 자기 목 앞에 놓여있는데, 이제 곧 죽어 나갈 판인데, 무슨 옆에 있는 사람이 바늘에 찔렸다고 신경 쓰고 있냐 이 말이다.

 

사실 눈에서 티를 뺀다든지, 눈에서 들보를 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티는 작으니깐 쉽고, 들보는 크니깐 어렵고 그런 것이 아니다.

둘 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눈은 굉장히 예민한 곳이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손발이야 상처가 나도 심하지 않으면 아물게 된다.

크게 다쳐도 아주 큰 불편은 없다.

하지만 눈은 다르다.

눈에 상처가 나면 회복되기가 어렵다.

아예 회복되지 않거나, 회복되어도 부작용이 심할 수 있다.

시력이 나빠지거나 심하면 실명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눈 속에서 이물질을 뺀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아무나 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료받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그런데 이 외식하는 교만 자들은 자기들이 남의 눈 속의 티를 빼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정말로 위험한 자들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눈에 들어간 들보와 티는 각자의 죄를 상징하는 것이다.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큰 죄든 작은 죄든, 그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의 도움에 의해서든 인간이 죄에 대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 외식하는 교만 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 죄에 대하여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교만한 자들의 비판이 이렇게 위험한 것이다.

 

오늘 많은 말들을 나누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여러분, 비판. 해도 된다.

아니 비판해야 한다.

우리 함께 비판하다.

무작정 행해지는 비난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비판은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비판할 때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의 공의로 비판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다.

누군가를 향한 비판이 그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의 회복이 목적이어야 한다.

두 번째,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한다.

이 말은 내가 백프로 깨끗한 뒤에 남을 비판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백프로 깨끗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교만이다.

이것은 스스로가 먼저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자기 성찰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 내가 상대방의 눈에 들어있는 티를 꺼내려 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된다.

티를 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다.

나의 역할은 잘못된 그의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나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에 현혹되어버린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주님의 올바른 뜻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로 지키고 있다.

500여 년 전, 독일의 성직자 마틴 루터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버린 교회를 보게 된다.

미쳐버린 교회는 큰 건물을 짓고, 돈을 모으기에 급급했고, 급기야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하는 저주받을 행위를 하고야 만다.

루터는 이런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를 향하여 95개 조 반박문을 작성하였고, 교회의 잘못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서 원래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 원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의 시작이다.

 

만약 루터가 썩어빠졌던 교회를 주님의 공의로 판단하지 않았다면…….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정신 나간 교회를 비판하지 않았다면…….

변질된 복음과 잘못된 사람들의 믿음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30대 청년의 목숨을 건 비판이 수많은 사람들을, 수많은 교회를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으로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이것 또한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임을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공의로…….

지금의 교회를, 세상을 판단하는 우리이기를 기도한다.

나 스스로가 먼저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겸손히 고백하며, 함께 주님의 뜻에 맞도록 바꿔나가자고 선포하는 우리이길 기도한다.

크게 지어 놓은 예배당 건물, 이유도 목적도 불분명한 화려함 속의 행사, 여기저기서 불러 모아 놓은 정체 모를 수많은 사람들, 복음은 빠져버리고 재밌는 말장난이 되어버린 설교…….

하나님의 영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런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에 현혹되어서 저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지, 저 교인들이 잘못 믿고 있는지, 저 목사가 잘못 설교하고 있는지 판단하지도 않고, 그저 아멘, 아멘 하면 안 된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주님의 공의로…….

판단하고 비판하여 잘못됨을 알리고, 올바름을 선포하는 우리 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그래서 썩어빠진 교회가 다시 한번 개혁될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와 함께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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