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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7 절기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마태복음 21:1-11)

by TwoTalents 2023. 4. 3.

 

제목 :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본문 : 마태복음 2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말씀 :

기독교의 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중이 큰 절기를 부활절이라고 말하는 것에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부활절보다 성탄절에 더 많은 행사를 한다.

세상 적으로도 부활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이지만, 성탄절은 연말을 맞이하면서 더 화려하고 즐기는 기간이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성탄절 때의 추억이 참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초등학생 시절, 성탄절 때 선물 받으러 교회 간 것이 처음으로 교회 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꽤 많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외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에서의 생각일 뿐이다.

내적인 기독교의 메시지와 비전, 목적, 그리고 기독교 존재의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부활절만큼이나 중요한 날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부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 주가 바로 부활주일이기 때문에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해서 나누도록 하겠다.

 

어쨌든 우리는 부활절에서 역순으로 주일을 뺀 40일 전부터 그 기간을 사순절이라 부르며 이를 지키고 부활절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 바로 고난주간이다.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우리 예수님 공생애의 절정이 그려진 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30여 년이 조금 넘는 생애에서, 특히나 3여 년 기간의 짧은 공생애에서 핵심이 되는 기간이 이 주간이다.

오늘은 이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던 날이다.

현대의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다고 하여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주간은 예수님 생애의 목적이 이뤄지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다.

예수님이 걷고 계신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의 길은 인류구원의 역사가 현실로 나타나는 위대한 발걸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기사는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마가, 누가, 요한복음까지 4복음서에서 모두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만큼 중요하고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 위대한 역사의 길, 예수님이 가시는 길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향하셨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또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에 함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원한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셨던 이 길은 겸손의 길[PPT]이었다.

먼저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본문 2, 3.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둘을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그대로 행하여 일을 처리한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나귀의 주인과 예수님은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개인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3번 이상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

그리고 그때마다 여러 이슈를 통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생겨났었다.

이 나귀의 주인도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귀의 주인도 메시아의 오심, 즉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다렸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제자들은 나귀를 쉽게 예수님께로 끌고 올 수 있었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다.

본문 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구약의 예언자 스가랴가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이다.

스가랴 99절에 기록된 말씀이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노새를 탔다고 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 것이다.

예수님이 타셨던 나귀는 짐을 싣거나 아니면 평민들이 타고 다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왕의 상징인 노새를 타지 않고 나귀를 타신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 혼자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 외치면서 환영을 했었다.

그래서 왕을 위해서만 흔들 수 있는 종려 가지를 예수님 앞에서 흔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예언의 성취라고는 하지만 노새가 아닌 나귀를 탔다는 것은 보통의 생각을 뒤엎는 것이다.

왕의 상징인 노새는 아니더라도, 멋있고 튼튼한 준마 정도는 타고 들어가야 그런대로 왕으로서의 폼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짐이나 싣는 나귀를 선택하셨다.

이것을 요즘으로 빗대어 말해보면, 대통령이 벤츠나 롤스로이스 같은 고급 세단을 타지 않고, 작은 경차를 탔다거나, 아니면 스쿠터를 몰고 어느 지역에 방문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상상이나 되는 일인가?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 그러니깐 노새가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이유를 스가랴 선지자는 그는 겸손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높이 계신 예수님의 낮아짐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왕이 이런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오겠는가?

이런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이 있는가?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좋고 멋있는 차를 타고 다니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권세와 힘을 자랑할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왕들, 권력을 잡은 자들의 모습이지 않은가?

오늘날 정치인들은 서민, 서민 외치면서 서민 코스프레를 자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인가?

겉으로만 그럴 뿐 결국 그들은 서민들을 개, 돼지로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왕은 다르다는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은 처음 세상에 나실 때부터, 그 누구보다 낮고 낮은 모습을 보이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또한 평생을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아픈 자, 힘없는 자들과 함께하셨다.

그리고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나아가는 이 순간에도 볼품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나아가고 계신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위대한 왕이지만, 더불어 가장 낮고 겸손한 왕이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왕은 너무나도 겸손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호산나 우릴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수많은 군중의 바람처럼 힘으로 로마를 굴복시키시는 분이 아니시다.

폭력을 폭력으로, 억압을 억압으로 갚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평화로, 용서로, 긍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온 인류를 위해 가장 낮아지신 겸손의 왕이시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겸손의 길을 기억하고 본받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또한 예루살렘을 향하셨던 예수님의 길은 죽음의 길[PPT]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자신이 왜 이 땅으로 내려오셨으며 공생애를 통하여 이루신 모든 일들이 무엇을 위한 준비였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던 것dl.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 의해 죽을 것이다.”

하지만 3일 만에 다시 살아 날것이다.”

 

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계속 말씀하셨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끼리 엉뚱한 경쟁을 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시고, 왜 이 땅에 내려오셨는가?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를 걸친 사역은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죽기 마련이다.

세상의 사람들의 삶을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의 죽음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그저 자기 인생 살아가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맞이하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 자신에게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와 여러분을 위한 것이었다.

앞서 말한 스가랴처럼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메시아에 관해 예언했었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이렇게 선포한다.

이사야 534, 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을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담당하시는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죽으려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아니 왜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질고와 슬픔이 너무나도 크고 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내려와서 대신 죽어야지만...

그렇게 해야지만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흠이 없는 그의 피가 아니면 이 땅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속죄의 법칙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시는 길은 바로 그러한 죽음을 맞이하시기 위한 발걸음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 죽음의 길을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의 기이한 죽음의 길, 인간을 위한, 나를 위한 이 죽음의 길을 내 머리와 마음속에서 영원히 간직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환호 속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길은 사랑의 길[PPT]이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자신의 죽는 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몇 날 며칠에 죽을 거야이런 분 있는가?

당연히 없다.

옛 속담에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도 자신이 죽게 되는 날을 알 수 없다.

혹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시한부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정확하게 그 죽는 날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의사들의 진단에 따라 대강 얼마 남았다더라 하는 정도이다.

그것도 잘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죽는 날을 너무나도 또렷하고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그것도 장소와 방법과 과정까지 모두를 알고 계셨다.

삼 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한 제자에 의해서, 자신이 팔릴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서서히 피를 흘리며, 조금씩 조금씩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성경 속에는 인자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토록 자신의 죽음을 상세하게 알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까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심정이 어떨 것 같은가?

자신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5일 뒤에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온갖 고문과 치욕을 당할 것이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게 될 것이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진 채 저 높은 산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 산 위에서 양손과 발에 커다란 못이 박힌 채로, 몸에 있는 모든 물과 피를 다 흘릴 때까지...

그때까지 서서히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 그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일 것 같은가?

그 심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상황이 되면 슬플 것인지, 괴로울 것인지, 화가 날 것인지, 아플 것인지 도대체 어떤 감정이 생기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거의 미쳐버렸을 것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에게 자신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짜를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사형이 언제 집행될지 몰라서 매일 매일 불안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처음에는 불안하지만, 나중에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수감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실수로 사형수가 자신의 형이 집행되는 날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통제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어차피 곧 죽게 될 거, 다른 사람과 같이 죽자는 식으로 덤벼들어서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자신이 죽는 날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인격을 모두 망가뜨릴 정도의 엄청난 정신적 고통이란 말이다.

지금 예수님께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고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상세하게 설명한 그 비참한 죽음을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께서 그렇게 했다고 누구 하나 욕할 사람도 없다.

오히려 제자들도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자고 부탁드렸다.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다.

 

그런데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 잘 알고 있으셨는데 말이다.

그냥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셨는데 말이다.

그냥 나귀에서 내려 뒤돌아서서 자신이 살고 있던 갈릴리로 되돌아가면...

그렇게 하면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너무 잘 알고 있으셨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대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 길로 나아가셨다.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예루살렘을 향하셨다.

스가랴의 예언과 같이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덧없는 환호를 받으며 나아가셨다.

도대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향해 나아가셨는가?

왜 인가?

................................

여러분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를, 바로 나를 온 천하보다도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이 죽어야지만 우리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신만이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감당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조용히 나아 가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 놀라운 진리를 믿는가?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을 처음과 똑같이 겸손하게 준비하셨다.

그렇게 죽기까지 낮아지셨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우리를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셨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싶어 하셨다.

인생의 단 한 순간이라도 이 놀라운 역사를 잊지 않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매일 매일의 발걸음이, 우리를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닮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과 기이한 죽음, 그리고 그 신비한 사랑의 발걸음이 지금 우리를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다는 진리를 믿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주님을 내 심령에 영원히 간직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날마다 동행하는, 기쁨으로 주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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