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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신약)/48 갈라디아서 묵상(I)

겉 멋이 잔뜩 들어서...(갈라디아서 3:1~9)

by TwoTalents 2021. 9. 5.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겉 멋이 잔뜩 들어서...

 

본문 : 갈라디아서 3:1~9

 

묵상 :

바울은 반복적으로 갈라디아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전한다.

본문에서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며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던 것이 과연 무슨 이유에서인지를 되새겨 보라고 주문한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애초에 이방인으로 율법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인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체험하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갈라디아 성도들이 왜 다른 복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율법의 행위에 혹해서 율법에 대해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이유는 바울도 이상하게 여겼던 것처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겉멋이 잔뜩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이방인으로 바울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바울의 말처럼 이들은 성령을 체험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며 성령의 역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의 경험상, 이렇게 갑자기 은혜받고, 방언 받아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된 많은 초신자나 새신자는 아주 위태롭게 보였었다.

 

어느 집단에서 기도 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믿음이 연약했던 한 자매가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을 받았다.

그 자매에게는 놀라운 일이고, 기도 모임에서도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자매가 방언을 받고 난 후에 좀 이상해졌다.

겸손하게 배우려던 그녀의 말투가 상대를 단정 지으며 가르치려는 것으로 바뀌었다.

언젠가부터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그녀는 한국에서 이름난 선교단체의 훈련과정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사야와 자신을 매칭시키고, 바울의 후계자를 말하면서 당혹스러운 비전을 제시했었다.

....................................

 

그 당시 나는 그 자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매님, 일단 성경을 먼저 읽으세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자매인 터라 그 말을 해줄 기회가 없었다.

이후에 그녀를 잠시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있어서 방언을 받고,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아 선교사가 되겠다고 비전을 제시했던 그때의 일들은 한때 뜨거웠던 믿음의 추억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이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후에 그것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신앙으로, 삶으로 제대로 융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라고 본다.

좀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그녀는 겉멋이 들어있었다.

신앙적 겉멋이 들어서는 방언 다음의 은사는 무엇이고, 그다음 단계로 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십일조 잘하고 교회에서 은사 달라고 기도 더 해야 하고.

이따위 헛소리하는 자들의 말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잘못된 인도를 받은 그녀는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 자매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과정을 겪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보았다.

 

혹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성령을 체험하고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다고 확신하는데.

이제 굳건한 믿음으로 말씀대로 살며, 예배하며 영광 돌리면 되는데.

그들은 눈에 보이는 그다음 무언가를 찾았다.

자신들이 한 단계 더 높은 믿음에 올랐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마침 어떤 이들이 와서는 율법을 전하고 있다.

할례를 얘기하고, 절기를 가르친다.

왠지 멋있어 보인다.

저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들을 내가 지키면, 나도 저들처럼 진짜 유대인이 될 것만 같다.

그리고 믿음도 지금보다 더 높은 단계에 이를 것만 같다.

이런 마음에.

겉멋이 잔뜩 들어서.

그들은 너무나도 빨리 은혜에서 떠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나 개인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멋있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초라함으로 시작하여, 초라하게 사시다가,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것이다.

처음을 말구유에서 시작하시고, 마지막을 십자가에서 끝내셨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두의 예상을 깨어버린 주님의 부활은 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이었다.

주님의 승천은 그 무엇보다 기막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주님의 다시 오심이 너무나도 기대되는 것이다.

 

혹시나 나에게 겉멋이 들어있지는 않는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멋있어지려고 하지 말자.

그런다고 멋있어지지 않는다.

그냥 지금처럼 초라하게 있자.

2000년 전에 초라한 자를 찾아오셨던 우리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에도 초라한 나를 먼저 부르시리라.

 

초라한 자들의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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