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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59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I)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 5:13~20)

by TwoTalents 2023. 10. 30.

 

제목 : 행동하는 믿음.

 

본문 : 야고보서 5:13~20

13.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9.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말씀 :

지금까지 살펴본 야고보서는 행동하는 것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행위가 없다면 그가 말하는 믿음은 가짜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행위가 우선이고 행위만 중요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야고보는 믿음의 실천,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강조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삶에서 드러나고, 행동으로 실천되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결국, 야고보도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서신을 마무리하면서도 기도와 함께 영혼을 살리는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며 서신의 끝을 맺는다.

 

먼저 야고보는 한결같은 기도와 찬양을 말한다.

본문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야고보는 고난받을 때 기도하라고 말한다.

고난 중에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히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요소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단지 고난을 벗어나려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기도는 고난 중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고난을 통해 주께서 보여주시는 당신의 뜻, 깨달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고난 속에서도 바른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인내함을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마저도 믿음으로 극복되고, 고난이 나에게는 더 이상 고난이 아니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야고보는 즐거울 때는 찬송하라고 전한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이다.

즐거울 때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라는 말이다.

그러니깐 야고보는 고난받을 때나 기쁠 때나, 모든 상황 속에서 한결같이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어떤 상황, 어떤 일에서나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는 말이다.

 

믿는 자들에게 한결같음은 참으로 귀한 자세이다.

환경이나 여건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을 향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인내하는 신앙일 것이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육체의 병으로 괴로울 때에도 기도할 것을 주문한다.

본문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아픈 자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함께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장로들은 믿음의 형제, 자매의 아픔에 대해 최선을 다해 기도하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의학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당시에는 의료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믿는 자의 행동이 모두 중요한 것이다.

 

야고보는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믿음의 기도로 먼저 구원이 이루어지고, 그런 다음에 그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과도 같은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를 고치실 때, 그의 구원받았음을 먼저 선언하시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누가복음 518~24.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이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병든 자를 위한 기도가 단순히 병 고침을 위한 기도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확실한 믿음으로 구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죄 사함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이 여전히 죽어있다면, 육체만 병이 낫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의 영혼이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본문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회개는 당연히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성도가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권고한다.

천주교에서는 이 부분을 고해성사의 근거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고해성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본문이 고해성사를 말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천주교의 고해성사처럼 굳이 골방에서 신부에게만 죄를 고백할 것이 아니다.

모든 성도와 나누어야 하는 것이 맞는 모습이다.

무엇보다 죄를 서로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자신의 약점, 멈춰야 할 죄, 고쳐야 할 것들을 기도 제목으로 함께 나누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같이 기도하고, 나를 위해 믿음의 형제, 자매가 기도해 주며, 그 믿음의 형제, 자매를 위해 내가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의 힘, 특별히 하나님께 온전히 죄 사함을 받은 의인의 기도에 큰 힘이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의인의 기도가 어떤 힘을 가지는지를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본문 17, 18.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이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열왕기상 171~7.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엘리야의 기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일어나는 부분이다.

그가 기도했을 때,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이다.

이후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다시 기도할 때, 역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내리시게 된다.

열왕기상 1842~46.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그저 인간의 능력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엘리야의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야고보는 엘리야 또한 우리의 똑같은 성정의 사람임을 강조한다.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처럼 연약하고, 우리처럼 힘들어하고, 우리처럼 부족한 사람이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야단맞았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깨달아서 주님을 높이기를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인 엘리야가 하나님을 믿고,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고 주 안에서 의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의인이 된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다.

엘리야처럼 우리도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다면...

구원받은 의인으로서 그 기도에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될 것을 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미혹되어서 진리를 떠났던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 대해 전하게 된다.

본문 19, 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서로가 고백한 죄를 위한 기도, 즉 중보기도를 넘어서, 아예 떠나버렸던 영혼을 돌아오게 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분명하게 너희 중에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 중에 누군가가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성도가 미혹되어 진리, 즉 예수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단, 사이비, 가짜들의 공격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미래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그날까지 미혹하는 영은 계속해서 믿음의 사람들을 흔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떠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야고보는 미혹되어 떠났던 자를 돌아오게 하는 것을 그의 영혼을 살리는 것,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새 신자를 전도하는 것과 같은 무게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야고보는 미혹되어 떠나버린 형제, 자매를 다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실질적인 믿음의 행동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서신을 마무리한다.

 

말씀의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야고보서는 이렇게 실질적인 믿음의 행위, 신앙의 실천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되어 있다.

행동하는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빛과 소금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기독교 초창기 야고보서는 단지 윤리적 교훈의 모음집처럼 여겨졌다.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마틴 루터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하대하면서 정경에서 제외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지금까지 정경으로 당당히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키신 것이라고 믿으며 확신한다.

개인적으로 야고보서를 통해 공동서신은 무게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바울서신과 함께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이제는 더 이상 야고보서의 진정성, 정경성을 의심할 여지는 전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서신이나 복음서보다 성도들에게 잘 읽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은혜받고,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내가 은혜를 베풀고, 내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믿는 사람이 실천해야 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내가 행하여야 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런 실천이 없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고,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고까지 경고한다.

그러니 이 야고보의 메시지는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나에게 부담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인지.

그러한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깐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에는 내 기분, 내 생각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께서 주신 말씀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면.

내 생각, 내 뜻과는 상관없이 지키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을 통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해 주신 그 주님이, 야고보를 통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경고해 주셨다.

 

야고보 장로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현대의 기독교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말씀이라고 확신한다.

사랑과 배려가 없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 때문에 떠나버린 사람들의 마음이, 행동하고 실천하는 참된 믿음으로 인해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 아름다운 회복의 시간에 사람이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이 함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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