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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59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I)

온전해질 준비 됐나요?(야고보서 1:1~4)

by TwoTalents 2023. 7. 23.

제목 : 온전해질 준비 됐나요?

 

본문 : 야고보서 1:1~4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말씀 :

오늘은 위의 본문으로 온전해질 준비 됐나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세베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가 아닌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이다.

사도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를 야고보 장로라고 부른다.

야고보 장로는 예수님의 동생이지만,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복음 증거자가 되었다.

야고보 장로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했지만, 야고보 장로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함께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바로 옆에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야고보 장로는 믿음의 실천을 누구보다도 강조하였다.

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2:26)이라고까지 말을 한다.

이는 얼핏 들으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사도 바울의 교리와 정면 대치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행함이 믿음의 결과이고 열매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음의 행함이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말하며 이신칭의를 설명한 것이고.

야고보 장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칭의의 결과로 드러나야 하는 믿음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앞으로 야고보서를 나누면서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베드로와 함께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야고보 장로는 스데반이 순교한 뒤에 일어났던 교회의 박해를 피해서, 전 세계로 흩어져 있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문안하며 자신의 편지를 시작한다.

본문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개인적으로 야고보 장로의 이 인사를 참 좋아한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야고보 장로는 예수님의 형제이다.

개신교에서는 동생으로 인정하지만,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의 동정성 때문에 이복형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것이 맞든지 간에 어쨌든, 형제이다.

혈연이라는 것은 참 중요한 관계이다.

그래서 혈연으로 인해 각종 특혜가 주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날에도 힘 있는 자와 돈 있는 자의 가족들은 자연스레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것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고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당한 혜택을 누리면서도 너무 뻔뻔하고, 너무 당당하다.

왜 그런가?

부당한 혜택들이 드러나고 밝혀져도 바뀌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그 사람들에게 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는 학력 위조 때문에 실형은 사는데, 권력자의 측근은 자기 입으로 학력 위조, 경력 위조를 자백했는데도 조사받기는커녕 국민을 속이면서 명품 쇼핑을 하고 있다.

일반 사람이 반복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며 사회를 어지럽혔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마 사회적으로 완전히 격리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가 조작, 사기 등 각종 범죄가 밝혀졌거나 정황이 보이는데, 조사도 제대로 안 하고...

재판도 질질 끌다가 어쩔 수 없이 너무 가벼운 실형을 선고한다.

그것도 과하다고 불평불만이다.

너무나 슬프고, 짜증나는 현실이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적폐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현대와 마찬가지로 야고보 당시에도 이런 부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고보 장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직계 가족임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힌다.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도 예수님을 믿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종이라는 것이다.

물론 당시 야고보 장로의 인지도는 굳이 자신을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밝히지 않아도 될 정도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말씀을 통해 야고보 장로의 겸손함을 발견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야고보 장로에게도 베드로나 바울처럼, 그가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베드로는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모른다고 맹세하며 부인했었다.

그런 베드로의 아픈 과거가 그를 주님 앞에서 그 누구보다 겸손하고, 열심인 사람이 되게 했다.

바울은 독기를 품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했고, 그것도 모자라 다메섹으로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사역 내내 자신에 대해 예수께서 세우신 사도임을 변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바울의 어두운 과거 행적은 그를 더욱 낮고 작은 자로,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이끌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야고보 장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다.

주님의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예수님의 행보를 말리려고 했었다.

예수님께서 한창 사역이 피치를 올리던 그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비난했던 야고보였다.

야고보 장로도 이러한 과거 이력 때문에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야고보 장로는 겸손한 마음,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히며, 세계로 흩어진 주님의 사람들에게 문안하며 당부한다.

야고보 장로는 이 서신의 서론인 오늘 본문을 통해 시험과 인내, 그리고 온전함에 관해 이야기한다.

본문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먼저 그는 시험을 이야기하며, 시험당할 때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

시험을 당하는데,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본문에서의 시험은 테스트가 아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문의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페이라스모이스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내부로부터 오는 사람의 생각, 유혹’, ‘temptation’이 아니다.

자기 갈등도 아닌 것이다.

본문의 시험은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을 가리키는 말이다.

앞서 말한 대로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교회를 향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해를 피해 흩어졌지만, 그 박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고난과 시련을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시기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하나 때문에, 그들은 매 맞고, 죽임당함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야고보 장로는 지금 그 사실을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

한 치의 불만도 없이, 조금의 근심과 걱정 없이, 순전하게 기쁨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과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평안해라’, ‘안정을 찾아라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야고보 장로는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고난받는 이들이 공감하기 힘든 이런 말의 근거는 무엇일까?

야고보는 본문 3절 말씀을 통해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본문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이 말은 말 그대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당하게 되는 시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련이,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시련으로 말미암아 인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내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인내가 무엇이기에 그것 때문에 기뻐해야 하는가?

 

본문의 시련은 헬라어로 도키미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결과적인 의미로 시험하여서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믿음의 연단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지금 야고보는 불가마에서 잘 정제된 금과 같이,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통해 인정되는 결과물이 바로 인내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시련을 통해서, 그 시련을 잘 견디면 인내라는 믿음의 결과물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결과물인 인내가 인정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깐 믿음의 시련이 있을 때, 그 시련을 이겨낼 때, 믿음으로 인정되는 인내가 만들어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시련은 기쁜 일이라는 말이다.

내가 믿음의 시련을 인내함으로 참된 믿음이라 인정받는 믿음의 결과물을 낳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야고보와는 다르게 로마서에서 인내를 과정으로 제시하였다.

로마서 53, 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주장은 다른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에 강조점을 두었냐?’의 차이이지 본질상으로 같은 말이다.

 

야고보 장로는 시련을 극복하는 것의 결과물로 인내를 제시하면서, 그 인내를 통해 이루어질 것에 관해 설명한다.

본문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선적으로 시련 속에서 기뻐함으로 온전한 인내를 이루라고 말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의미이다.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할 때, 우리의 믿음을 지킬 때, 그때에 우리는 온전하게 되고, 부족함이 전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한 성결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구비하여의 헬라어는 홀로클레로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전체부분의 의미를 모두 가진 합성어이다.

이는 신체의 각 부분이 모두 건전해지는 것으로 온몸 전체가 온전해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시련을 이겨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으로 온전해질 때, 믿음으로 오직 주님만 의지할 때, 당연히 모든 삶에서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결국, 시련을 극복하고, 인내함으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믿음의 시련을 기쁘게, 그것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련 속에서도 기쁨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시험이나 시련과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나 하나만을 위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다.

더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세상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맞춰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 전에는 없었던 믿음의 시련이 지금 다시 생기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것은 그동안 믿는 자들의 잘못된 처신으로 인해 자초한 일이 대부분이긴 하다.

잘못된 처신으로 인한 것, 교회가 불법을 저질러서 비난받는 것이라면 일단 잘못된 처신과 불법을 멈추고 고치는 것이 우선이다.

 

어쨌든 우리는 어떤 종류이건 간에 시련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럴 때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련에 임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나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 야고보 장로는 시련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

시련 앞에서도 기쁨으로 인내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때 온전히 인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기뻐함으로 온전히 인내를 이룰 때, 우리의 믿음이 완성되고, 주님 앞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온전하게 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정경으로 인정된 신약 성경 중에서 가장 많은 시련을 겪은 책이 바로 야고보서이다.

야고보서는 바울이 전한 이신칭의와 상충한다는 문제 등으로 계속해서 정경성에 공격을 받았었다.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마틴 루터도 초기에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표현하며 하대했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수많은 공격에도 지금 정경으로 인정되어 지금 우리에게까지 주어졌다.

그렇기에 그 말씀이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참된 믿음은 고난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임을 고백한다.

시련 속에서도 진정으로 기뻐할 때, 기쁨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참된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내를 열매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인내가 주께서 말씀하신 천국을 보게 하실 것이다.

그 천국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그 기쁨이 우리를 다시 시련에서 건져낼 것이다.

그러기에 시련이 닥치더라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저는 시련을 기쁘게 여기는, 시련 속에서 기쁨을 찾는 마음이 너무나도 부족했음을 고백한다.

많은 날들을 여러 가지 시련 때문에 여지없이 흔들리고 넘어졌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나누며 더욱 기도하며 참으며, 시련 속에서 기쁨으로, 지금보다 더 깊은 인내를 이루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기도한다.

더불어 모든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도 시련을 기뻐하는 담대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으로 온전한 인내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 인내로 참된 믿음을 세울 수 있기를, 주님 보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준비가 되셨는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뻐하자.

믿음의 시련으로 인내를 이루어 내자.

온전히 이루어진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게 할 것을 믿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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