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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6 아포칼룹시스 요안누-요한계시록(I)

일곱째 나팔.(요한계시록 11:15~19)

by TwoTalents 2020. 8. 26.

 

제목 :

이미지 출처 - 이정헌 작가 '페이스북'

 

제목 : 일곱째 나팔.

 

본문 : 요한계시록 11:15~19

15.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6.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9.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말씀 :

나팔 심판 중간에 삽입된 부분이 모두 끝났다.

나팔 심판에서는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심판과 다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 심판을 구분하고 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을 새롭게 첫 번째와 두 번째 화라고 말하였고, 일곱 번째 나팔 심판을 세 번째 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말한다.

 

이제 일곱째 나팔이 불려졌다.

본분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일곱째 나팔 소리는 왕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세상의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선포한다.

하늘에서 들려온 큰 음성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소리임이 분명하다.

본문의 왕 노릇은 헬라어로 바실류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통치하다’, ‘다스리다의 뜻을 가진다.

온 세상이 주와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아래 있게 됨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큰 음성을 듣고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본문 16, 17.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본문의 24 장로는 요한계시록 4장에서 나누었던 24 장로와 동일한 존재들이다.

다시 설명하면.

24 장로에 대해서는 영적인 존재라는 해석과 육적인 존재라는 해석 두 가지가 있다.

영적인 존재로 보는 것에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천사들의 무리라는 해석이다.

육적인 존재로 보는 것에는 역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지파의 12 장로와 신약 시대의 12 사도를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24는 완전수 12의 배수로 구약 성도들 12와 신약의 성도들 12를 합한 24, 즉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떤 주장이든지 타당성도 있고, 무리한 부분도 있다.

우리는 이 24 장로를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로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한 해석을 적용할 것이다.

 

그러니깐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왕 노릇을 하게 되신 주와 그리스도를 향해 신구약의 모든 성도를 상징하는 24 장로가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4 장로는 주를 향해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이심을 노래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으시고, 여전하시고, 동일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신약의 하나님이시며, 지금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24 장로들의 찬양은 그들이 4장에서 올렸던 찬양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4장에서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라고 찬양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장차 오실 이가 빠져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그리스도가 오셨고, 역사를 완성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권능을 잡으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시간인 것이다.

 

이 시간이 믿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당연히 환희와 영광의 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을 외면하는 열방에게는 분노의 시간이 될 뿐이다.

본문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 역사를 묵도하게 되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분노를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회개함으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힘쓴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믿음이 성장해 왔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기는커녕 하나님의 징계에 분노하는 이들도 있다.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부당하게 생각하고, 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다가 결국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이방 민족들이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일곱째 나팔이 불려지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실 때, 이방 민족은 분노하며 주님의 다스림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들도 하나님의 통치 이전에 있을,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징계를 부당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 즉 우상을 의지하면서 분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들이 흥분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성토한다고 하여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주님의 진노가 허망한 이방의 분노를 잠재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게 분노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 중 이미 죽은 자마저도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신다.

이는 인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한다.

대적자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깨달음으로 조금씩 성장해온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상주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통치는 대적자들에게는 분노를 일으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더불어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이다.

말세에 일어나는 같은 하나님의 통치이지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그 통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24 장로의 경배가 끝나고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열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보게 된다.

본문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지상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성전이다.

그리고 본문의 언약궤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지상 성전의 언약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과 백성 간의 새 언약을 암시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만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찢어졌다.

이후로는 수시로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 절의 언약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동시에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 마무리.

일곱째 나팔은 마지막 최후의 심판과 관련되어 있다.

최후의 심판 후에 있을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나라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 한대로 하나님의 통치, 주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통치에 속하고, 주의 나라로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소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자신들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식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 공동체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지금 나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가?

기쁨과 환희,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인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그 나라를 바라보면 분노하고, 이를 갈며 눈물 흘리는 슬픔인가?

 

현재 전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코로나는 한국 사회를 전혀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한국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몇몇 교회는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부한다고 거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벌써 바뀌었어야 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된 희망을 성도들에게 전파하였다.

이제 코로나로 인하여 반강제로 교회는 바뀔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한국 교회는 코로나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이 썩은 고름을 짜내는 치유의 시간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한다.

 

우리는 대면 예배의 금지를 통해 예배의 참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인지 스스로를 점검하게 되었다.

교회로 인해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우리는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던 것이 맞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두 계명에 대한 교회의 모습을 깊이 묵도하고 있다.

만약 지금의 모습에서 전혀 변화가 없다면, 과연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기쁨이 될 수 있을까?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해야 하지는 않을까?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 공동체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반드시 기쁨이 소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하여 듣고, 깊이 묵상하고, 성실하게 실천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도 내 영혼이 하나님께 확정되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전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날.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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