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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6 아포칼룹시스 요안누-요한계시록(I)

일곱째 인과 성도의 기도.(요한계시록 8:1~5)

by TwoTalents 2020. 7. 15.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일곱째 인과 성도의 기도.

 

본문 : 요한계시록 8:1~5

1.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2.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3.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말씀 :

요한계시록 6장에서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지고 난 후에, 7장에서는 심판 날의 성도들에 관한 설명이 등장하였다.

이제 이어서 8장에서는 남은 일곱째 인이 떼어지게 된다.

본문 1, 2.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일곱째 인이 떼어지고 난 뒤에 반 시간쯤 침묵이 흐르게 된다.

본문의 반 시간은 헬라어로 헤미오리온이란 단어로 한 시간을 반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다고 꼭 30분을 정확하게 지칭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전체적으로 고요하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일곱째 인이 떼어지고 난 뒤에 흐르는 고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지지를 받는 해석은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침묵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해석이다.

그만큼 성도들의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이 된다.

다른 한 가지는 이제 펼쳐질 하나님의 심판을 숨죽인 채 기도하며 기다린다는 해석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 자체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성도의 기도를 가볍게 여기는 해석은 아니다.

왜냐하면, 뒷부분에는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에 끼치는 영향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면, 첫 번째의 경우는 침묵의 시간에 성도들의 기도가 상달 되어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된다는 해석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하나님의 심판이 준비되는 그 시간 성도들이 기도하므로 그것에 참여한다는 해석이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하나님의 심판과 성도의 기도가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해석으로 모두가 가능한 해석이다.

 

어쨌든 일곱째 인은 다음에 등장하는 일곱 나팔 재앙을 준비하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본문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일곱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구약 위경 중의 하나인 1 에녹서에는 일곱 명의 천사장이 거론되고 있다.

거기에 소개된 일곱 천사장과 본문에 일곱 천사가 같은 천사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1 에녹서에 의하면 일곱 천사장의 이름이 우리엘(Uriel), 라파엘(Raphael), 라구엘(Raguel), 미카엘(Michael), 사라카엘(Saraqael), 가브리엘(Gabriel), 레미엘(Remiel)이라고 되어있다.

이들을 본문의 일곱 천사와 동일하게 보는 이유는 1 에녹서에 따르면 이 일곱 천사장들이 성도들의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하였다는 기록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일곱 천사장이 본문에 나타난 일곱 천사와 동일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냥 흥미로 여기시길.

 

이렇게 침묵의 시간과 일곱 나팔이 준비된 다음에 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들고 등장한다.

본문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본문의 또 다른 천사가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본문 그대로 또 다른 천사로 보는 견해가 있고, 천사로 표현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다른 천사를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천사가 중보자의 역할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본문에서는 성도들의 기도와 하나님 사이에서 이 다른 천사가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중보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굳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었다면, 일곱 인의 봉인이 떼질 때 처음 표현했던 어린 양으로 말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하는 중보자의 역할이 대속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본문 그대로 또 다른 천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고, 우리는 그냥 또 다른 천사라 생각하고 나눌 것이다.

 

이 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가지고 서서는 많은 향을 받게 된다.

이것은 그 향로와 성도들의 기도를 합하기 위함이다.

다른 천사는 향로와 성도들의 기도를 합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보좌 앞, 제단에 드리게 된다.

앞서 말했지만, 이 부분을 중재자, 중보자의 역할로 보는데, 여기에는 대속의 의미가 없다.

단지 하나님의 제단 앞에 향로와 성도들의 기도를 올리는 제사장의 역할로 봐야 한다.

제사장은 제사를 대행하는 대행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는 숭배의 대상도, 기도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천사들이 들고 있던 향로와 함께 합해진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게 된다.

본문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이전에 성도들의 기도가 먼저 하나님께 상달 된 것이다.

본문의 천사의 손으로부터라는 표현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를 드릴 수 없고, 반드시 천사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는 사람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

본문은 종말론적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확실하게 들으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조금 다른 예이지만, 천주교는 성모마리아에게 기도를 한다.

이것이 개신교와의 차이 중에 중요한 부분인데, 개신교에서는 천주교가 성모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은 성모마리아를 신으로 인정하고 믿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에 천주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은 마리아를 믿어서가 아니라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힘을 빌리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요한복음 2장에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적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육체적 어머니인 마리아의 간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해서 드려지는 기도 중에는 마리아의 기도가 제일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대도, 즉 자신의 기도를 대신해 달라는 부탁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천주교의 주장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를 동일시 여기는 오류이다.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 때는 주님의 때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주님의 때이다.

믿는 우리로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마리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 주님께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의 기도와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본문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이제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으로 일곱째 인의 재앙이 시작되었다.

이는 찬사가 향로를 가지고 땅에 쏟으매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을 심판을 행하심을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인간의 죄악 때문이다.

그 죄에 대한 대가로 징계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작은 성도의 기도에 있다.

성도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심판의 때를 결정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는 것이 맞는지 불안해 하기도 한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거나, 응답 되지 않는 것 때문에 기도를 하면서도 의심할 때가 있다.

물론 기도의 응답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어쨌든 본문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지 불안해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의 기도, 나의 기도로 인해 종말의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종말에 우리가 하나님께 주로 드리는 기도가 무엇일까?

종말이 가까울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신앙생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지키려는 믿음의 의지.

아마도 이런 시기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바라는 기도가 가장 많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성도가 고난 중에도, 고통 중에도 끝까지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 공동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여야 한다.

지금은 교회조차도 기도보다 정보를 우선시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설교도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설교를 작성하게 한다.

정보가 교회를 운영하고, 정보가 교회 각 부서를 움직인다.

정보를 무시하거나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도보다, 말씀보다 우선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정보를 통해서가 아니다.

정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영적으로 체험하고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기도를 통한 성령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결국, 세상의 마지막 심판도 그 시작은 성도의 기도에 의한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가장 큰 특권이자 축복은 바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축복을 기억하여서 오늘도 기도하고, 내일도 기도하여서,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에 동참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한마음 신앙 공동체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고,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진실하고 놀라운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신천지에서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일곱째 인이 떼어지는 것 역시 신천지와 유재열의 장막성전에 적용시킨다.

일곱 봉인에 담긴 심판이 유재열의 장막성전, 즉 일곱 금 촛대 교회에 내려진 심판이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한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이따위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들의 일방적인 어설픈 주장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어설픈 주장을 하는데...

그럼에도 믿는 사람들이 자꾸 신천지의 이상한 말에 넘어가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아마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일것이다.

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전할 때, 확실하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아니 줄수가 없다.

정답을 주는 순간 거의 100% 이단이다.

그런데 신천지는 헛소리일 지언정 정답이라고 뭔가를 제시한다.

만약...혹시라도 그들의 주장이 맞을수도 있지 않는가?

아무도 정답을 말하지 않는데, 그들은 정답이라고 떠들고 있지 않는가?

 

신천지를 향한 혹시나는 역시나일 뿐이다.

자주 전하는 말이지만, 잘못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우리는 일단 신천지의 모든 말은 거짓말이다라고 생각하고 들어야 한다.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찾는 심정으로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거짓말이 하나하나 보이고 들리게 된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허술하기 때문이다.

나름 성경을 인용하는데 그것도 다 틀리게 인용하고 있다.

처음부터 틀렸네하고 바라보면 끝까지 틀린 것 투성이가 바로 신천지다.

 

거짓 가르침, 다른 복음...

이런 것에는 결단코 관용이란 있을 수 없다.

철저한 배제만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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