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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결국 입다는...(사사기 12:1~7)

by TwoTalents 2020. 1. 8.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결국 입다는...

 

본문 : 사사기 12:1~7

1.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 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 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4.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 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 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 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말씀 :

지금까지 살펴본 입다의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삶이었다.

오늘은 이렇게 성공과 실패를 연이어 반복했던 입다의 삶, 그 삶의 마지막을 살펴보려고 한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머리이며 군대 장관의 자격으로 치렀던 첫 전쟁, 암몬과의 전쟁을 완벽하게 승리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솔한 서원으로 인해 하나뿐인 딸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 입다는 어떤 상태일까?

입다는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결코 기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자신이 이스라엘 장로들의 제안을 수락하고 암몬과의 전쟁을 치른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입다가 이런 상태인데, 여기에 입다를 더 분노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느닷없이 에브라임 지파가 암몬과의 전쟁에 관해서 시비를 거는 것이다.

본문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들이 지금 막 목숨 걸고 전쟁을 마친 사람에게.

그것도 자신의 실수로 딸을 불살라 번제로 드린 입다에게.

전쟁에 자기들 부르지 않았다고, 입다의 집을 불살라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다.

불붙은 곳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에브라임 지파는 애초에 남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지파는 역사적으로 볼 때, 계속적으로 특권을 누린 지파였다.

그래서 그것이 어느 때부터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스라엘의 지파 중 최고는 에브라임이여야 하고, 지도자도 에브라임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런 우월감과 교만, 특권의식은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골칫덩이가 되게 하였다.

이전에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도 이 에브라임 지파는 힘겹게 전쟁을 마친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었다.

왜 전쟁을 치르면서 자기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마치 자기들이 대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 또 그런다.

기드온 당시에는 기드온이 재치있는 말로 에브라임의 분노를 진정시켰다.

그들을 칭찬하며 기드온 자신보다 더 잘났다고 치켜세워 준 것이다.

다행히 그것으로 무마가 되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입다도 기드온처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입다가 지금까지 대화를 통해 협상한 것을 계속 보아왔다.

그런데 지금 입다는 정상이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딸을 잃게 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그것도 자신의 섣부른 서원으로 인해서 말이다.

얼마 전에 딸을 불살라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찾아와서는 너희 집을 불사르겠다고 에브라임이 협박을 한 것이다.

용사 중의 용사였던 입다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본문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지금 입다와 에브라임의 주장이 완전히 다르다.

에브라임을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분노했는데, 입다는 불러도 당신들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력을 봐서는 에브라임이 억지 주장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어쨌든 입다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에브라임을 향해 선전포고와 같은 말을 해 버린다.

본문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도와 달라고 해도 당신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우리들 끼리 목숨 걸고 암몬과 전쟁을 치렀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다 끝나고 인제 와서 전쟁에 대해 감 내라 밤 내라하는 것이 할 소리냐는 것이다.

이 말은 정말 짜증나니깐 그만하고 덤빌 테면 덤벼라라는 의미의 말이다.

바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방 민족,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우선적으로 협상을 시도했던 입다이다.

그런데 같은 민족인 에브라임의 도발에 대해서는 헛소리하는 것 듣기 싫다고 선언한 다음 바로 전쟁에 돌입해 버린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다의 영적 상태가 말이 아닌데, 열을 받을 대로 받은 것이다.

본문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에브라임 사람들이 불 얘기하면서 입다의 심기만 건드렸던 것이 아니었다.

에브라임과 길르앗의 지난 과거사를 들춰내며 길르앗 사람들의 자존심에까지 상처를 준 것이다.

본 절에 나타나는 사건이 정확하게 무슨 사건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속해 있던 길르앗 사람들이 어떤 일로 인해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너희는 우리에게 안에 있다가 도망간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 전쟁을 치르고 정신도 피폐해 졌는데, 자기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니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리가 없다.

이 민족 간의 전쟁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길르앗의 승리로 끝나 버렸다.

계속 전쟁을 치르던 길르앗 사람들을 상대로 지금껏 평안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에브라임이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에브라임은 대패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입다의 엉망인 영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을 또 보게 된다.

본문 5, 6.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입다와 길르앗은 민족을 향해 그 손에 전혀 자비를 두지 않았다.

에브라임이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가는 이들까지 쫓아가서 철저하게 도륙해 버린다.

요단강 나루터에 군사를 배치해 놓고는 거기서 요단강을 건너 도망가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하나 하나 색출해 내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그 사람의 말투, 발음을 확인하게 된다.

같은 단어를 에브라임과 길르앗은 다르게 발음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쉽볼렛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곡식내지는 이삭정도가 된다.

그런데 이 단어에 대한 정확한 발음을 에브라임 사람들은 지방 사투리로 인해 잘하지 못했다.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강 나루터에서 쉽볼렛을 발음하지 못하는 에브라임 사람, 사만 이천 명을 죽이고 만다.

물론 이런 사태가 일어난 계기는 에브라임의 교만과 억지 때문이었다.

에브라임은 자신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고픈 욕심에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을 깎아 내리며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딸은 잃은 입다를 자극하여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지난 역사를 들추어내어 길르앗 사람들이 이성 잃은 입다에게 동조하게 하였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고,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같은 민족을 사만 이천 명이나 죽였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참극이고 비극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결국 입다는 하나님의 사사로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어떤 삶을 산 것인가?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자기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협박했던 에브라임을 역으로 도륙해 버렸다.

그럼, 입다는 성공한 지도자인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사사인가?

 

단언컨대 입다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 완전하게 실패한 사사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심을 다 이루셨다.

배교하는 암몬을 벌하셨고, 교만한 에브라임을 꾸짖으셨다.

그런데 입다는 실패하였다.

본문 7절에서 설명되는 입다의 마지막도 이를 확인시켜 준다.

본문 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그의 활동 기간은 기간이 기록된 사사 중에서 가장 짧았다.

그리고 그가 사사로 있었던 시대에는 평화의 시대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입다의 시대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무남독녀의 죽음으로 입다의 가문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딸의 유언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해마다 잘못된 서원으로 자신의 딸을 죽게 한 입다의 어리석음이 반복적으로 기억 되어지고 들춰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입다 스스로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배교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그런 환경 속에서 함께 했던 입다가,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해 실수하고, 실패의 잔을 마시게 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깨닫게 하셨다.

그가 돌이킬 수 있게,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말이다.

입다의 경우, 딸의 죽음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지만, 그녀의 죽음이야말로 입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기회였음이 분명하다.

입다는 서원을 돌이켜서 딸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였다.

그래서 경솔한 서원대로 딸을 번제로 드리고 말았다.

놀랍게도 입다의 딸은 순종함으로 입다의 고뇌를 덜어주었다.

그렇다면, 딸이 죽기까지 했다면.

입다는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았어야 했다.

괴롭고, 슬프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았어야 했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왜 전쟁에서 승리한 자신이 이런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지.

어떻게 돌이키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입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밀려든 인간적인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거기다가 좋지 못한 시기에 발생한 에브라임의 도발은 입다의 영적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어 버렸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이 임했던 입다가...

같은 민족, 에브라임과의 전쟁을 자신의 감정대로 진행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더 잔인하고 더 철저하게 에브라임 사람들을 사만 이천 명이나 죽이고 말았다.

 

입다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결국,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이다.

물론 과정에서 드러나는 성공과 실패가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다.

그러한 과정이 모여서 마지막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공과 실패에서 드러나는 현상들 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무엇을 깨닫고, 결국, 내가 어디로 향해 나아가느냐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다.

성공하였다 하여도, 성공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에 도취 되어 있다면.

그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과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뿐이다.

비록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 실패의 인한 현상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그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일어선다면, 이것은 최고의 결과를 위한 커다란 힘이 되는 것이다.

 

입다는 다시 일어났어야 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자신을 그 고향의 머리 되게 하셨던 주님을 믿고 의지 했어야 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나아갔어야 했다.

그것으로 자신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했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신앙공동체 여러분.

나에게 겹겹이 몰려드는 영적 공격들.

나의 힘든 부분을 노리고 달려드는 악한 영의 세력들.

나의 약함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단의 유혹들.

연약한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의해 휘청거릴 수 있고, 넘어질 수도 있다.

아예 미혹되어서 죄를 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시 깨닫고 일어날 기회를 주실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 신비한 사랑이 임하시는 그 시간에 용기를 내어 주님과 함께 일어날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나를 일으키셨던 주님, 나를 치료하셨던 주님, 나를 높이셨던 주님, 나를 구원하셨던 주님, 나를 사랑하셨던 주님.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반드시 다시 일어나서, 결국 우리는 승리하였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교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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