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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무서운 이야기(사사기 10:6~16)

by TwoTalents 2020. 1. 7.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무서운 이야기

 

본문 : 사사기 10:6~16

6.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10.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말씀 :

106절부터는 6명의 대사사 중 하나인 입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입다는 6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사사로 활동했다.

그에 비해 많은 기록이 사사기에 남아있다.

이것은 입다가 사사로 있는 동안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예상하게 해준다.

 

입다의 기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늘 본분은 입다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이야기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오늘은 이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이 무서운 이야기이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본문 6절 말씀.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또, 다시 여호와 하나님 눈앞에서 악을 행한 것이다.

그 악은 바로 우상 숭배이다.

그런데 이번 우상 숭배는 지난 죄악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열한 우상만 7개이다.

7은 이스라엘에서 완전 수이다.

그러니깐 꽉 차 있고 만연한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 우상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아니 완전 수니 뭐니를 따지지 않더라도, 이전까지 이렇게 많은 우상들을 한꺼번에 섬긴 적이 없었다.

종류만 일곱이지 모두 복수로 표현되어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14개 우상 이상을 섬겼다는 것이 된다.

앞선 돌라, 야일 두 사사 시대의 40년 넘는 평화가 이스라엘 민족을 또다시 영적으로 미치게 만든 것이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참으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신다.

본문 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이방 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벌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때와 좀 다르다.

하나님의 분노가 이전 상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두 배의 고통, 두 배의 징계를 하고 계신다.

블레셋과 암몬, 두 이방 민족을 동시에 일으키신 것이다.

그리고 상당히 긴 시간 그들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본문 8.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18년 동안 블레셋, 암몬 두 민족의 압제를 받으며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본문 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요단강 서편에서는 블레셋에 의해, 동편에서는 암몬 자손에 의해 공격받아 압제를 당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고통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본문의 곤고가 심하였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야차르이다.

이는 짓누르다’, ‘쥐어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 이방 민족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학대받은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되니깐 그제서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다시 찾는다.

본문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다른 방법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지 않으셨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범죄, 우상 숭배의 잘못을 철저히 뉘우친 회개가 맞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스라엘 민족은 18년이나 블레셋, 암몬 두 이방 민족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렇다면 18년 동안 뭘 하고 있었을까?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는 대항하고 갈등의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럼 종교적으로는 어떠했을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 하나님을 버리고 경배했던 그 이방 신들에게 구원을 간구했을 것이다.

그렇게 구하다 구하다 안되니깐 마지막에 예전에 함께하셨던 여호와를 기억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가?

본문 11~1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먼저 이스라엘과 함께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셨던 많은 역사를 나열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버리고 섬겼던 7종류의 이방 잡신들에게서 어떻게 보호하시고 승리하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말씀 서두에 언급했던,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신다.

본문 13~14.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죄를 저질렀다.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버렸고, , 다시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이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이다.

지금, 이 말씀은 이제 이스라엘이 회개해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스스로 책임지고 대가를 치르라는 말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회개를 받지 않을 테니 너희가 저지르는 잘못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시면 여기서 살아남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가?

이제부터 내 영혼이 죽지 않기 위해 작은 잘못 하나, 실수 하나 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얼떨결에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고스란히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데.

그 생명을 온전히 유지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민이니 뭐니 그런 거 필요 없고,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아버지 버리고 다른 아버지 좋다고 했으니깐 그 아버지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든지 말든지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단단히 삐지신 것이다.

사랑이 큰 만큼 배신감도 크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들의 배신이 하나님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고 모욕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리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거기다가 앞서 언급한 대로 이스라엘은 진실한 회개를 하는 것도 아니다.

습관처럼 죄를 저지르고, 습관처럼 회개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습관적인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하나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스라엘 민족도 당황했던 것 같다.

그들은 좀 더 진지하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 15, 16절 상반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말씀, 용서를 거부하셨음에도 다시 한번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 맞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대로, 하나님 뜻대로 하시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한 번 만 더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말뿐이 아닌, 실제적인 행동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다.

몇십 년을 섬겨왔던 이방 신들을 모두 제하여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섬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신 하나님의 반응은 이러했다.

본문 16절 하반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 부분을 놓고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노력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셨다는 것.

그래서 결국 사사 입다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해석도 참 좋아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다른 해석을 살펴볼 것이다.

본문에서 무서운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회개해도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결심을 말하였다.

두 번째로 말하려는 무서운 이야기가 바로 16절 하반절의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본문에 나타나는 근심이란 말은 카차르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짧다’, ‘조급하다’, ‘참을 수 없다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근심은 무엇인가 걱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무언가를 참기 어려우신 것을 표현한 말이다.

하나님의 인내심에 한계를 드러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곤고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개가 아니라 그들의 곤고를 참지 못하셨던 것이다.

앞서 긍정적인 해석은 이 곤고를 말 그대로 곤고로 해석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곤고를 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곤고가 그 곤고가 맞는 것인가?

16절의 곤고는 히브리어로 아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고뇌, 수고로 얻은 것, 노고, 노력, 불행, 재난, 악 등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성경의 역사서에는 사사기에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전도서로 주로 수고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어두운 면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것에 대한 함의가 담겨 있다.

그러니깐 헛수고, 헛고생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 16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곤고는 암몬이나 블레셋에 당하는 압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그 수고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고가 헛수고, 헛고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그들의 수고는 참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16절 하반절을 이런 방향으로 재번역한다면 이렇게 된다.

 

이스라엘의 헛수고 때문에 여호와의 마음이 참기 힘들 정도로 상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거부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삶을 바꾸면서까지 간구하는 회개를 듣기 싫어하시는 것이다.

그만 징징대라고 짜증을 내시는 것이다.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도 이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

헛수고하지 말고 너네 아버지한테 가라는 것이다.

 

지금, 이 하나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하나님이 맞는가?

집 나갔던 방탕한 둘째 아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했던 아버지가 사사기의 하나님과 다른 분이신가?

아니다. 분명히 같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변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럼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왜 이토록 무서운 말씀을 스스로 선택하신 민족에게 짜증 내며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자비하시고 긍휼하신, 사랑의 하나님마저도 외면하실 정도로 이스라엘의 죄악이 너무나도 심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죄악은 일회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반복적이었고, 결국 습관처럼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스라엘은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죄를 범하면서 그와 함께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회개를 하나님께 올린다.

아무런 진정성도 없는 회개,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더라는 경험적 학습 효과로 인해 이방 신을 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보기도 싫어하시고, 듣기도 싫어하시고, 함께하기도 싫어하시는 것이다.

결국, 그들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신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공동체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반복적인 죄와 그것을 위한 습관적인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인간은 계속적으로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반복되더라도 제대로 된 회개는 이전보다 나를 더 성장하게 한다.

다음번에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자라가야 한다.

그런데 사사기의 이스라엘은 이전보다 더한 죄악을 저질렀다.

더 많은 우상을 섬겼다.

점점 더 뻔뻔해 져 버렸다.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다고 하면서도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떼를 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회개한다고 반드시 용서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없다.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 줘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제라도 버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나를 버릴 수 있다.

말 안 듣는 자들을 버리시고 저 돌들을 일으켜 찬양케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다가, 주님의 자비를 기만하다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가?

무서운가? 별로 인가?

하나님의 유기, 주님의 외면을 경험해 보았다면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지를 알 것이다.

결단코 이 무서운 이야기를 경험하지 않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반응하는 믿음의 패밀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계속적으로 죄를 짓지만, 그와 함께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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