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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때려서라도...(사사기 3:1~6)

by TwoTalents 2019. 9. 9.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때려서라도...

 

본문 : 사사기 3:1~6

1.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5.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말씀 :

오늘 본문인 이 짧은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과 인간에 대한 절망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을 포기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하나님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이스라엘이 등장한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제 이스라엘에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만 남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여호수아의 세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나갔던 세대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게 뭐가 문제인가?

시간이 지나면 한세대가 물러가고 다음 세대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가 전쟁을 아예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현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이 가나안 땅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땅이 되었으며, 어떤 전쟁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희생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모른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전쟁에 경험이 없고, 그것을 모른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전쟁을 모름으로써 전쟁에서 함께하셨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던 하나님을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깐 이 가나안의 모든 전쟁을 모르는 세대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인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주와 지지난 주에 언급했었다.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교육의 부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쟁도 모르고, 그 전쟁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 당신을 모르는 이 세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을 시험하였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본문의 시험은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시험은 테스트이며, 테스트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이 시험, 테스트의 방법이 본문 2절에 나타난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이방 민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에게 자신을 나타내고자 이방 민족을 남겨두신 것.

처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욕심 때문에 쫓아내지 않았던 이방 민족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향한 채찍으로 사용하시려고,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남겨진 이방 민족의 면면을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본문 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이 남은 이방 민족을 지도로 만들어 보면 가나안땅 전국 각지에 조끔씩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순종의 징벌로 남은 가나안 땅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가시 같은 존재로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가시 같은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가르침의 도구로,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본문 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남겨두신 이방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본문의 시험은 아까 1절의 시험과는 또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의 시험은 고난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에게 여러 모양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략질이 될 수도 있고, 전쟁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여러 가지 유혹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렇게 민족 전체가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의 조상들처럼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면서도 계속 속아주셨다.

속아주면서, 계속 기회를 주셨다.

회개하고 회복되기를 원하셨다.

반복되는 잘못에 반복적으로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한 번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해 버린다.

본문 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아니 가나안 이방 민족을 다 쫓아내라는 명령을 따르지도 않더니.

그럼 경계를 두고 그들을 멀리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아예 그들 가운데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본문의 가운데는 히브리어로 케레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속에’, ‘안에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가,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 속에서, 그들 안에서 함께 생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민족에 대해서, 분노하신 하나님이 자신도 이방 민족을 결단코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시겠다고 하셨다.

이 말이 그들과 이제부터 함께 왕래하면서 사이좋게 살라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사사기를 나누는 동안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 민족을 남겨두지 말고 모두 쫓아내라고 하셨는지를 계속 얘기했었다.

단순히 그들을 남겨두고 함께 거주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걱정하신 대로 결국, 그대로 되어버리고 만다.

본문 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처음에는 그냥 근처 지역에서 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왕래를 하는 것이다.

왔다 갔다 하면서 보니깐 가나안 민족의 누구누구 딸이 예뻐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렵게 이방 민족의 예쁜 여인과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다.

첫 번째가 어렵지, 한 번 시작된 결혼이 두 번째부터는 당연히 더욱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이방의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자기 딸을 이방인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세대가 바뀌면서도 계속 이방인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관계가 아니라 연속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이방 민족,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하신 그 가나안 민족과 연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가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들과 가족이 되면서 사단이 나버리고 말았다.

읽었던 6절 말씀 하반절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결국은 이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경계했던 이유, 이방 민족을 다 쫓아내라고 명령하신 이유.

그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죽음으로, 사망으로 온 민족이 나아가는 것이다.

 

본문에는 신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신들을 섬겼더라라고 말하고 있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애굽에서 이 가나안 땅까지 인도한 이 철없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이방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함께하게 된 이방 민족의 온갖 영적 유혹에 다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본문의 섬기고는 히브리어 원어로 아바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몸과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으로 종교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이방신들을 향해 예배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전쟁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선택이고 영적 상태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려고 이방인을 남겨두셨다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포기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랑과 그 은혜를 받으면서도 너무 빨리 주님을 떠나 버리는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무 쉽게 주님을 포기하고 이방신을 선택한 그들의 어리석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을 수 있다.

주님 앞에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수도 있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여러 방법을 통해 책망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책망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여러분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니 포기할 수가 없다.

주님은 책망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 깨달음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에게도 이스라엘을 위해 남겨 놓으신 이방 민족과 같은 가시가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처럼 그 가시 때문에 불평, 불만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 가시 때문에 타협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에게 절할 것인가?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그 가시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 가시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세게 붙잡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 가시로 인해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 가시가 나를 위한, 여러분을 위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놀라운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서신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16~9.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놀라운 믿음의 비밀을 믿는가?

이 믿음대로 이루시는 하나님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올려 드린다.

이 믿음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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