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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신약)/41 마가복음 묵상(II)

선택은 나의 몫.(마가복음 4:1-20)

by TwoTalents 2023. 11. 22.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제목 : 선택은 나의 몫.

 

본문 : 마가복음 4:1~20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묵상 :

본문은 너무나 잘 아는 씨뿌리는 자와 밭에 관한 비유이다.

비유와 함께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까지 해주셨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역시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은 육지에 있지 못하신다.

본문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그래서 여느 때처럼 바다에 배를 띄우시고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러 가지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그 내용을 보면 씨뿌리는 자와 네 종류의 밭이 등장한다.

네 종류의 밭은 각각 상태가 서로 다르다.

그래서 똑같은 씨가 뿌려지지만, 그 씨가 열매 맺어지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씨는 각각 길가, 흙이 얕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에 뿌려지게 된다.

길가와 흙이 얕은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씨 자체를 새가 먹어버리거나, 뜨거운 햇볕에 말라버리거나 한다.

오직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4절 이후로 이 비유가 뜻하는 바를 제자들에게 밝히 설명하신다.

씨는 말씀이고, 밭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인 것이다.

길가는 애초에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깨달음이 없다.

돌밭은 환난과 박해 때문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말씀을 듣고 잠시 기쁨은 있지만, 말씀에 깊이가 없기 때문에 머지않아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기타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가치와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부자 되고 싶고, 권력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오직 좋은 땅, 말씀을 받아들이고, 묵상하고,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결실은 당연히 세상의 성공, 부와 명예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풀이해주시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본문 10, 11.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비유에 대해서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답이 지금 함께하는 사람들 말고 외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알 수 없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대답하신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 316절을 외우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큰 혼란을 생길 수밖에 없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신가?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실 분 아닌가?

그런데 외인들에게는 천국이 비밀이라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

예수님의 이상한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어서 더 노골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본문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외인들이 보아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돌이켜서 죄 사람을 받을까 봐 그러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예수님은 진정 온 세상을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맞는 건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항상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바로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비유를 들었던 누구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제대로 몰랐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 그때까지도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과 열두 제자가 그 비유에 대해서 예수님께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의 대답으로 비유를 풀이 해주셨다.

그리고 그 풀이를 듣고 제자들은 비유의 뜻을 알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외인은 비유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묻고자 예수님께 찾아오지 않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비유의 뜻을 묻고 깨닫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비유를 듣고 그냥 넘어간 것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듣고도 질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사람들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그들을 그냥 방치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예수님의 책임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주님이 허락하신 자유의지로 본인이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의 책임은 오롯이 본인들에게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될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외인이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이 천국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을 직접 막으신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빗대어서 표현해 보면, 말씀을 받은 나의 심령이 길가가 될 것인가? 돌밭이 될 것인가? 가시떨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좋은 땅이 될 것인가?

이것은 말씀의 씨가 뿌려진 뒤에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적용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이들에게는 똑같은 말씀의 씨가 뿌려진다.

어느 하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심령의 상태로 인해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가 드러날 뿐이다.

적어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마음 자체를 사탄에게 빼앗긴 길가와 같은 심령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돌밭과 같이 핍박과 환난을 이기지 못하고, 가시떨기와 같이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심령이 많이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좋은 땅을 허락하시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좋은 땅이 되는 것조차도 바로 나의 선택,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의 심령이 돌밭이라면, 나는 그 돌들을 치우는 수고를 스스로 해야 한다.

나의 심령이 가시떨기라면 가시떨기를 자르고 뽑아내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등에 돌이 찍히고, 손가락에 가시가 찔려도, 그렇게 해야 좋은 땅이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나의 심령이 살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러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돌을 치우고 가시떨기는 뽑아내는 작업이 어떤 것인가?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계속해서 주님께 질문하는 것이다.

어제 읽었던 말씀이 이해되지 않으면, 오늘 또 읽는 것이다.

그리고 묵상하고 주님께 깨달음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으면, 내일 또 읽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돌덩이와 가시떨기를 치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말씀을 담당하고 있는 주의 종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의문의 답을 얻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말씀을 대하는 진지함과 간절함을 갖게 된다는 것이 진실로 중요한 것이다.

 

나는,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선택은 나의 몫이다.
나의 심령이 길가가 될 것인가? 돌짝 밭이 될 것이가? 가시떨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좋고 기름진 땅이 될 것인가?

결국,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10518,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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