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변화되지 않는 믿음.(사도행전 21:17-26)

by TwoTalents 2023. 2. 27.

제목 : 변화되지 않는 믿음.

 

본문 : 사도행전 21:17~26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말씀 :

드디어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설교에서 나누었듯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에게 핍박이 가해질 것을 알고 있었다.

믿음의 동료들도 그 사실을 알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울 역시 두렵고 떨렸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뜻이 우선이기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겪게 될 어려움을 걱정하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들은 바울에게 고난을 피할 방법을 제안하였고,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여 실행에 옮긴다.

오늘은 이 부분을 집중해서 나누어 볼 것이다.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바울을 믿음의 형제들은 반갑게 맞이한다.

본문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바울이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거기다가 바울의 사역에 대해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해 유럽 각지의 교회에서 구제 헌금을 모아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의 방문을 기쁨으로 영접하였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하루를 보낸 뒤 이튿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게 된다.

본문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야고보는 물론 장로들까지 모두 모인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공식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식적인 만남이긴 하지만, 공개적인 만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직 일반 성도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바울을 적대시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그 부분이 신경 쓰였던 것 같다.

 

바울은 야고보와 교회의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신 이방 사역의 역사를 하나하나 보고한다.

본문 19~20절 상반절.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은 자기 간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낱낱이 전하였다.

앞서 말 한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의 사역에 대해 어렴풋이 소식은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세하게 알지는 못하였다.

그렇기에 바울이 전하는 소식에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고, 기뻐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것은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의 사역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본문의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에 거룩한 성령을 체험했던 그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았다.

본문 20절 하반절.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향해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임을 밝힌다.

이 수만 명이 모두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인지, 아니면 오순절을 맞이해서 모여든 사람들을 포함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선 듯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시며, 기존의 랍비들과 다른 놀랍고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모세와 선지자의 강령이 무엇인지 말씀하셨고, 진리 안에 참 자유가 있음을 선언하셨다.

무엇보다 율법 때문에 예수님께서 모함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 않은가?

거기다가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체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말씀이 아닌 율법에 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20여 년 동안 이들의 신앙이 오히려 퇴보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들이 없다.

오직 야고보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루살렘 교회는 분명히 양적으로는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발전이 없고, 오히려 후퇴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이렇게 율법의 열성인 자들 때문에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의 신변을 걱정하게 된다.

본문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자신들은 율법에 열성을 내고 있는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들은 것이다.

본문의 모세를 배반했다는 것은 율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그랬고, 또 유대인에게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열성 유대인들의 주장은 거짓이다.

가짜 뉴스를 듣고 그것을 그대로 믿고 있거나.

아니면 유럽 곳곳에서 바울을 방해했던 유대인들처럼 그를 시기하여 모함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부정한 적이 없고, 무시한 적도 없다.

오히려 유대인을 전도하기 위해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던 사람이다.

그리고 할례에 대해서는 그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717~20.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무슨 말인가?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구원의 요소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니깐 할례를 받으면 되고, 이방인들은 크게 상관없으니 굳이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할례는 본질이 아닌 비본질의 영역일 뿐이다.

바울은 할례를 받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에게는 그냥 할례를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가짜 뉴스, 오해로 인해 비롯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이 핍박받는 일이 없게 하려고 이해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한다.

본문 22~24.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마침 서원한 사람 네 명이 있었다.

이들은 결례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었다.

결례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각종 제물을 드려야 했기 때문에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거기다가 네 명이니깐 상당한 재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비용을 바울더러 부담하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면 율법에 열성인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고 바울을 향한 오해를 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많은 사람을 설득하기보다 바울 한사람이 노력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제시한 해결책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있으니깐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자신들이 직접 바울을 변호하면 되는 것 아닌가?

유대인들이 얼마가 되었든지 각각 나누어진 그룹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룹을 담당하는 장로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바울을 변호하고 그의 사역을 전하면서 설득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방법을 선택한 것인가?

유대인은 다수고 바울은 한사람이니깐 바울이 노력하면 일이 쉽게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런데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그들에게 바로 가르치는 것이 맞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 교회의 성도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이 내놓은 방법은 너무나 이기적이면서도 본질을 해결하지도 못하는 미봉책일 뿐이다.

 

아무래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지도자들의 설득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율법주의 성도들의 세력이 더 컸던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설득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이상한 해결책을 해결책이랍시고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런 경우를 볼 때가 있다.

몇몇 장로나 중직들의 많은 헌금이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회가 있다.

그런 교회에서는 중직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무시할 수가 없다.

그 사람들 눈치 보면서 교회 행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찬양팀으로 활동하는 청년들은 대부분 그런 중직들의 말 때문에 상처받거나, 찬양팀을 그만두거나, 심하면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정말 심각한 것은 목회자의 설교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헌금 많이 내는 중직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설교는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이라면 상관없다.

그런데 꼭 해야 할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니 말씀이 제대로 전달되겠는가?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 상황이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과거의 일까지 소환해서 바울을 설득한다.

본문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사도행전 15장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고 있다.

과거에 어떤 유대인들이 할례 문제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일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과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었다.

그때 종교 회의까지 열어서 본문 15절과 같은 결론을 얻어냈었다.

그때의 결정을 각 교회에 편지해서 지금까지 존중하면서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 그러는 것인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깐 이번에는 바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위해 자신들의 말대로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바울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온전히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미봉책일 뿐이고, 해결된다고 해도 언제라도 다시 오해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될 뿐이다.

거기다가 바울이 무슨 돈이 있는가?

선교한다고 떠돌아다니던 바울에게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의 결례 비용을 대라는 것이 가당찮은 말인가?

예루살렘 장로들은 바울이 모금해서 가져온 구제 헌금을 보고 한 말임이 분명하다.

구제 헌금을 결례 비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구제 헌금을 그렇게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그런데 바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우려해서 그걸 위해 구제 헌금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아니 자기들이 어떻게 해서든 진실을 전하고 잘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이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 바울이 어떻게 했을까?

바울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본문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의 말을 받아들여 믿음의 타협을 한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에게 닥칠 고난을 알고 있었다.

동료들이 말렸는데도 목숨까지 내놓을 작정을 하고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그랬던 그가 핍박이 무서워서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겠는가?

아니다.

바울은 그런 노력이 있어도 자신에게 주어질 핍박이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선교적인 차원에서 나름의 결론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다.

혹시라도 그런 과정에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아니 한두 명이라도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해를 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로 장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구제 헌금을 결례 비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장로들은 아무런 회의도 거치지 않고 그냥 말을 했던 것이지만.

바울은 그것 역시 구제의 일부로 생각했을 것이다.

결례를 마치려는 네 명이 가난해서 제물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러니 그들을 결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충분히 구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음날 성전에서 서원했던 네 사람의 결례 비용을 부담하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바울에게 제시했던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의 방법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도 아니었다.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그러니깐 올바르지도 않고, 해결도 못 하는 최악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상처가 나면 아프더라도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해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처가 낫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보기 싫다고, 상처 위에 약이 아니라 분장하듯이 화장으로 덮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처는 더 악화될 뿐이다.

나중에는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태가 될 뿐이다.

예루살렘 장로들이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바울이 붙잡혀서 로마로까지 가게 되는 여정, 그러니깐 주께서 예비하신 역사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예루살렘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고, 성도들이 삶의 변화가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지도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교회는 오늘날 많은 교회의 모습과도 너무나 비슷하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이 별로 없고.

그래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봉합하려고 하고.

속으로 어찌 되었든지 겉으로 갈등이 없으면 평화로운 것이고.

교회 시끄러운 것 싫으니깐 약한 사람이 양보하면서 좋게 좋게 넘어가고.

진리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없으니 성도의 삶에 변화는 없고.

그러면서 지금의 모습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인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교회가 문제를 봉합하는 곳인가?

보이는 갈등을 안 보이게 하는 곳인가?

잘 중재해서 좋게 좋게 마무리하게 하는 곳이 교회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교회는 진리를 전하는 곳이다.

문제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더라도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다.

갈등을 안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곳이다.

좋게 좋게가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곳이다.

그저 말로만 주여 주여하는 곳이 아니라, 믿음으로 삶이 변화되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아프더라도 진리를 찾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당장 문제를 봉합하려고 진리를 전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거짓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리를 찾고, 진리로 깨닫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며, 진리와 함께 삶이 변화는 사람이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사람이교회'는 온라인교회입니다.

'사람이교회'와 함께하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saramichurch@naver.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