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불행 중에 영광이 드러나다.(사도행전 20:7-12)

by TwoTalents 2023. 1. 29.

제목 : 불행 중에 영광이 드러나다.

 

본문 : 사도행전 20:7~12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말씀 :

오늘 본문은 드로아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드로아'는 영어로 Troas이다.

오늘날 튀르키예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알렉산더대왕의 장군인 안티고누스가 건설한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이다.

그런데 드로아를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도시 트로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가 트로이를 대체해서 건설된 도시이기 때문에 두 곳을 한 지역으로 보는 관점인 것 같다.

트로이는 무슨 이유에선지 항구로써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티고누스 장군은 대체 도시로 트로이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를 건설했던 것이다.

그러니깐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의 드로아는 트로이 목마의 그 트로이가 아니다.

트로이의 대체 도시로 건설된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드로아이다.

 

어쨌든 오늘 본문은 이 드로아에서 집회 중에 졸다가 죽음에 이르렀던 유두고라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울이 한창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이 유두고라는 사람이 창가에 걸터앉은 채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이다.

이것 때문에 유두고는 예배자로서 좋지 못한 모습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집회 중에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졸았다는 것이다.

어떤 목회자는 설교 시간에 졸면 유두고처럼 될 수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협박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유두고의 사건을 누군가의 주장처럼, 들어야 할 말씀을 약한 의지 때문에 못 듣다가 낭패를 당한 이야기로만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말씀을 나누며 이 부분을 함께 살펴보았으면 한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누가와 합류한 후에 드로아로 가서 그곳으로 먼저 보냈던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먼저 보냈던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지는 구제헌금을 관리하기 위해 각 교회에서 대표로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드로아에서 7일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드로아를 떠나기 하루 전 마지막 날에 드로아의 성도들과 떡을 떼며 나눔을 가졌었다.

본문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그 주간의 첫날은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켰었다.

그러다가 점차 주일을 지키게 되었는데, 본문은 주일에 공식적인 집회를 가진 것에 대한 첫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떡을 떼려고 모였다는 것은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임은 공식적인 예배의 모임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깐 주일에 공적 예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집회의 열기는 뜨거웠다.

이제 내일이면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야 한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늦게까지 말씀을 강론하였고, 사람들도 밤중까지 함께하였다.

어두운 밤이지만 불을 밝혀서라도 집회는 계속 이어졌다.

본문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던 것 같다.

몇 명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로 인해 복잡하고, 집회 열기도 뜨거웠다.

거기다가 많은 등불로 인해 상당히 공기가 탁하고 후덥지근한 상황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이렇게 뜨거운 집회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본문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말씀의 서두에서 잠깐 소개했던 것처럼,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된 것이다.

한 창 말씀으로 깨달음과 기쁨을 얻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시간에 사람이 죽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자칫 지금까지 받은 깨달음이 모두 날아갈 판이다.

 

유두고가 왜 창문에 걸터앉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일단 다락방의 넓이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으로 앉을 공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두고가 처음부터 창문에 걸터앉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졸음을 쫓기 위해서 창문에 앉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집회가 열리는 다락방의 상황은 복잡하고 후덥지근한 상태이다.

거기다가 밤늦게까지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피곤하고 졸음이 쏟아진 것이다.

유두고에게는 잠을 깨기 위해서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두고라는 이름에 주목하는 학자들도 있다.

유두고는 헬라어로 행운이라는 뜻이다.

뜻으로만 본다면 참으로 좋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유두고라는 이름이 당시에 주인들이 노예에게 흔하게 지어준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9절과 달리 12절에 사용된 청년이라는 말에는 헬라어 파이스’(παίς)가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당시 주인 밑에서 일하는 노예를 말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그래서 본문의 유두고는 노예였고, 그는 낮 동안 힘겨운 노동을 감당한 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 집회에 참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몸이 너무 피곤한데, 다락방의 공기는 탁하고, 점점 길어지는 집회에서 말씀에 집중하지 못한 채 졸음을 이길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긴 하다.

하지만 유두고가 노예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니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어쨌든 본문의 상황에서 유두고가 예배를 대하는 마음과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예배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치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두고를 불성실한 예배자의 표본처럼 성도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저는 유두고가 말씀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고 보고 있다.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다.

바닥에 앉아 있다가 졸음을 쫓으려고 창문에 걸터앉았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창문에 걸터앉았든지...

그는 졸음이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예배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육체의 연약함이 그 마음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두고가 예배에 불성실했기 때문에 받은 벌이라는 해석은 지나치게 인과응보적인 관점에서 말씀을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결코 인과응보적이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게 닥친 현재의 불행으로 그 사람의 과거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인과응보를 거부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91~5.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사람들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조상이 죄를 지었든지, 부모가 죄를 지었든지...

누구라도, 이 사람이 맹인이 될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맹인이 맹인 된 것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죄 운운하면서 과거에 집착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현재가 중요하고, 미래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지금 그 맹인이 맹인인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이제 곧 그 맹인을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철학은 누가복음에서도 나타난다.

누가복음 131~5.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억울하게 권력에 희생된 사람들과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닥친 불행은 그들의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서 그런 불행을 겪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앞서 읽은 요한복음 9장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그 맹인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불행한 일을 당한 유두고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게 된다.

본문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유두고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바울과 사람들이 바로 유두고에게로 내려갔었다.

바울은 쓰러져 있는 유두고 몸을 덮은 모습으로 안았다.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도 죽은 자에게 이런 모습으로 기도한 기록이 있다.

바울은 유두고를 안고 곧바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 빠르게 주어졌다.

유두고가 곧바로 살아난 것이다.

바울은 유두고가 살아나 생명이 그에게 있음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너무 급작스러운 전개로 인해 유두고가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잠시 기절을 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삼 층 정도면 사람이 떨어져 곧바로 죽을 정도의 높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이 힘없이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삼 층이 아니라 책상 위에서 떨어져도 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의사 출신이다.

의사인 누가가 유두고라 죽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가 바울보다 먼저 유두고의 죽음을 확인했다.

만약 순간적으로 죽었다고 착각한 것이라면...

그런데 알고 보니 죽지 않았던 것이라면...

실시간 기록도 아닌 사도행전을 이렇게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죽음을 마치 죽음이 아닌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누가복음 851~52.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죽은 야이로의 딸을 예수님은 잔다고 표현하셨다.

당신께서 곧 살리실 것이기에 그렇게 표현하셨을 것이다.

사도행전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누가는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을 자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의 영혼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한 것은 유두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거나, 곧 살아날 것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무엇보다 12절에서 사람들은 깨어난 청년이 아니라, ‘살아난 청년으로 인해 위로받았다고 말한다.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실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어쨌든 열기가 더 해가던 집회에서 사람이 죽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자칫 지금까지의 은혜가 헛된 수고로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 한대로 유두고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죽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더 큰 은혜가 드로아 교회에 임했던 것이다.

본문 11, 12.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렇다면 이제 집회를 멈추고 각자 집으로 흩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다시 모여 다시 떡을 떼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처음에 모였을 때는 바울이 강론을 했었다.

바울이 일방적으로 말씀을 해석하며 전한 것이다.

그런데 유두고가 살아난 뒤에 이제는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문의 이야기는 헬라어로 호밀레오라는 단어로 함께 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서로의 은혜를 나누었다는 말이다.

바울의 설교로 시작되었던 집회가 유두고로 인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난 뒤에, 성도들이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는 것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드로아 성도들은 큰 위로와 큰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말씀 마무리...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적을 말할 때, 이적의 3가지 목적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놀라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두 번째는 구원의 확신이다.

여전히 흔들리는 성도에게, 불안해하는 성도에게, 갈등하는 성도에게 이적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약한 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이적으로 상한 자를 치유하고, 슬퍼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고, 스러진 자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이적도 이런 목적을 이루었다.

바울과 함께한 뜨거운 집회의 마지막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놀라운 이적으로 마무리하였다.

인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바울이 떠나더라도 하나님께서 드로아 교회와 함께하신다는 표적을 유두고라는 청년으로 남겨주셨기에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드로아 성도들이 말씀을 갈망하고, 말씀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이 머무는 마지막 날 밤중까지,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 함께했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를 바울이기에, 그를 통해 한 말씀이라도 더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주어진 불행을 놀라운 이적으로 역전시키시고 응답하신 것이다.

 

드로아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묵상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 영광으로 감동하여 주신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며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이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사람이교회'는 온라인교회입니다.

'사람이교회'와 함께하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saramichurch@naver.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