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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신약)/42 누가복음 묵상(I)

겸손한 자, 더 겸손한 자.(누가복음 3:15-38)

by TwoTalents 2022. 1. 12.

이미지 출처 - Daum 블로그 '나팔수'

제목 : 겸손한 자, 더 겸손한 자.

 

본문 : 누가복음 3:15~38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묵상 :

오늘 본문에는 요한의 마지막 행적과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부분이 전해진다.

이 말씀을 통해 나누고 싶은 부분은 겸손에 대한 것이다.

제목을 먼저 설명하자면.

겸손한 자는 세례 요한을 말하는 것이고, 더 겸손한 자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겸손이 너무나 중요함에도 잘 실천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겸손을 살펴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본문 15~17.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당시에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

그는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혹시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그의 메시지는 위엄이 있었다.

이런 경우 누구라도 흔들릴 수 있다.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주위에서 자꾸 추켜세우면 마음이 혹할 수 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런 중에도 자신을 지키게 된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이전에 세리와 군인들에게도 자신에게 부과된 것 이상을 바라지 말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자신에게 부과된 것 이상을 바라다보니 이상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합당하게 주어진 것에 만족을 못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결코 자신에게 부과된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추켜세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오히려 자기 뒤에 오는 이가 더 큰 이이며, 더 강한 이임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그는 뒤에 오는 그 사람의 신발끈을 묶고,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로 겸손하였다.

주인의 신발끈을 묶고 푸는 일은 노예 중에서도 가장 천한 노예에게 주어진 일이다.

같은 유대인 노예는 하지 않고, 이방인 노예에게만 부과된 일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뒤에 오시는 이에 비하면, 자기는 그렇게 낮고 천한 존재라고 말할 정도를 겸손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허락된 것 이상은 바라지도 않고,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다.

본문 18~20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만을 열심히 한 것이다.

그 밖에 여러 가지를 권하여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 것이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비판하였다.

회개를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며,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만 열심히 감당하다가 마지막을 맞이한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 그것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인식하는 자세.

그 마음으로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이것이 세례 요한이 보여준 놀라운 겸손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겸손이 나타난다.

본문 21, 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례 요한은 놀라운 겸손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겸손한 자보다 더 낮아지셨다.

자신보다 더 약한 자, 낮은 자에게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예수님의 겸손이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 합당한 일, 해야 할 일에 있어서 머리를 숙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일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다.

만류하는 세례 요한을 오히려 만류하시며, 겸손한 모습으로 머리 숙여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렇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본문은 예수님의 근원에 대해 전하는 것이다.

본문 23절 한 절만 보겠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이렇게 시작해서 쭉쭉 올라가서 하나님에까지 이르게 된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라고 해서 아브라함부터 시작이 된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역으로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게 된다.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복음서이다.

그렇다 보니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설정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역으로 올라가 하나님에게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싶은 부분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겸손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겸손을 말하면서도 스스로 겸손한지를 잘 모를 때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너무나 교만해졌다.

마치 이스라엘이 자신들은 선민이기 때문에,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아 보인다.

그러면서 이방인을 향해서, 세상을 향해서 교만을 떨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가 자기들은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만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법, 사람들의 상식, 일상적인 도덕을 다 무시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고 있다.

이런 시대에 진실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보여준 참된 겸손이다.

 

겸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인식하였다.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며,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초법적인 존재가 아니다.

교회는 법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이 나라의 국민이다.

세상 법으로 합당하게 제재되는 것에 대해 우리만 예외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과된 것 외의 것에 대해 욕심부려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 커져 버린 교회가 많이 있다.

그러니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다.

교회는 어느 정도 커지면 자기들끼리 모여있으면 안 되고 흩어져야 한다.

대형 교회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것 이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또한, 나보다 잘난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말이 틀렸고, 상대의 말이 맞다면.

그가 나보다 어린 사람, 직위적으로 낮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일, 합당한 일, 정직한 일에 대해서는 나보다 낮은 사람, 약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한다.

나보다 못 배우고, 나보다 가진 것이 없고, 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머리를 숙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세례 요한에게 머리를 숙이셨던 겸손을 배워야 한다.

 

신앙인의 실천적 덕목은 사랑이다.

그러면서 신앙인이 가져야 할 성품적 덕목은 겸손이다.

사랑과 겸손은 모든 성경이 강조하는 중요한 덕목이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보여주셨던 놀라운 겸손이 각인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것으로 주님을 닮고, 주님이 원하시는 겸손의 모습을 간직하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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