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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0 베드로, 고난을 논하다-베드로전서(I)

선을 행한다는 것.(베드로전서 2:18~25)

by TwoTalents 2023. 12. 9.

 

제목 : 선을 행한다는 것.

 

본문 : 베드로전서 2:18~25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말씀 :

앞선 본문에서는 세상 권력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고 참된 권력에 순종해야 하지만, 악하고 잘못된 권력에 대해서는 올바름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오늘 말씀도 권력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주 말씀이 국가적이고 전체적인 권력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부분적이면서 개인의 권력과 관련된 말씀을 나누고 있다.

베드로는 당시 종의 신분, 노예 신분으로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주인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친다.

본문 18~20.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본문의 사환은 단순히 노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예는 둘로스를 사용하는 데, 본문에서는 오이케테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가신, 가정의 종을 의미한다.

노예와는 다르게 영구적인 노예가 아니었으며, 일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당시에는 노예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본문에서 말하는 사환들, 고용된 종들도 주인 때문에 고통받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런데 이 고통, 고난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면, 그것은 억울한 것이 아니다.

참는다고 칭찬받을 것도 없고, 계속 일하려면 당연히 참아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고난이 아니다.

단지 벌 받는 것이다.

하지만 부당한 고난, 그러니깐 주인이 오해했던지, 아니면 화풀이로 그랬든지 어쨌든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면 그것은 고난인 것이다.

자신이 당하지 않아야 할 고통이기에 고난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고난을 참고 견딜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가르침을 오늘날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가르침을 문자 그래도 적용할 수는 있는가?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나 전셋집 주인, 아니면 건물주 같은 자들이 악행을 하더라도 그저 참으며 견디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베드로가 전하는 주된 요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본문의 주된 요지는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노예가 주인에게 징계받았을 때, 실제로 잘못 때문에 벌을 받는 것과 잘못은 없지만, 주인의 갑질로 고난받는 것과는 하나님 앞에서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억울한 고난을 받는다고 하여도 그 종은, 그리스도인인 그 종은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당시의 상황, 베드로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전해진 메시지이다.

당시의 종이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갑질을 당했다고 해서 하소연할 곳이 없다.

어디에 가서 그것을 호소할 것인가?

아무 데도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나쁜 생각이나 극단적인 생각 말고, 계속해서 선을 행하며 잘 견뎌내라는 말이다.

약한 자들을 향한 주님의 위로과 관심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은 회사에서 고용주가 부당한 짓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공정거래위원회에 재소해야 한다.

사장이랍시고 갑질을 해 대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바로 올려야 한다.

그리고 JtbcMBC 방송국에 제보하고, 그다음에는 인권위에 고소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고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당연한 징계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베드로는 당시 종이나 노예들이 받았을 억울한 고난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심을 전한다.

본문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왜 예수님께서 잘 알고 계시는가?

예수님 본인이 공생애 동안 오해받고 모함당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그 죄를 대신 지시고는 너무나도 참혹한 고난을 받으시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런 당신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고 말한다.

믿는 자들 모두가 예수님처럼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론 주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을지언정, 그것이 정말 죽을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의 고백이 나온다.

누가복음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해서 같은 죽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억울한 고난과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본문 22~24.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누가복음에서 강도가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그 입에서 거짓을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억울함 속에서도 고난과 죽음을 감당하셨다.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해서 세상과 똑같은 모습은 부당하게, 악을 행하고, 있는 그대로 갚아주는 행동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렇게 해야 인간을 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고 채찍을 맞으셨다.

그의 억울함이 우리에게 나음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억울한 고난 중에도 선을 지키신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본문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전에 인간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목자 없는 양은 목적지가 없다.

아니 목적지를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는 곳에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단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짐승들로 인해 두려움에 떨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원래 목자가 다시 세워지신 것이다.

이제 양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목자를 따라 양이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도 없다.

무서워할 것도 없다.

오직 목자되신 주님께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지난주 본문과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나라가 부당한 권력으로 인해 참 자유가 없었던 시절 목회자들이 왜곡하고 악용했던 많은 말씀 중 하나이다.

많은 목회자가 이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고, 설교하면서 부당한 정권, 합당하지 않는 권력에 복종할 것을 가르쳤다.

믿는 자들이 해야 할 것은 단지 그 권력을 위해 기도하고, 권력에 순종하면서 권력과의 그 어떤 갈등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결코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권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라는 말도 아니다.

권력을 향한 순종과 불순종이 주된 주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믿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삶에서 선을 행하라는 것이었다.

벌을 받아도 억울한 벌이어야지, 당연한 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억울함을 다 견디셨기 때문에 죄 사함을 이루신 것이 아니다.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선하신 뜻을 유지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베드로는 이 땅의 삶을 나그네의 삶, 행인의 삶이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왜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가르쳤는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본향이 있다.

그 본향에 가기 위해서 오늘 베드로는 선을 행하라고 전한다.

억울한 상황에서도 선한 마음을 잃지 말라고 권고한다.

세상 권력이 아무리 악을 행하면서 나를 넘어트리려고 하여도, 나는 나를 지켜내라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선한 삶을 지키고 승리하라고 가르친다.

억울한 고통을 당할 때, 반드시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나에게 부당한 고통이 주어진다면, 그 고통 가운데에서 다시 한번 나의 믿음을 확인하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오래 참음과 인내로 우리의 목적지를 기억하고, 그곳을 소망하며, 그곳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춰나갈 수 있는 우리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영화 한 편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202328일에 개봉한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라는 영화이다.

 

이미지 출처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실제로 있었던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게 된 여고생 소희’(김시은)가 회사로부터 부당한 갑질을 계속 당하였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지만, 아무리 호소해도 자신의 억울함을 제대로 들어주거나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소희 학생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 생을 끝내는 것이었다.

분명히 회사의 악행으로 인한 사건임에도 이 사건은 단순 자살 사건으로 마무리되려고 한다.

그런데 소희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여러 의문을 품는 형사 유진’(배두나)이 한 제보를 받고는 좀 더 자세히 사건을 조사하려고 한다.

그러자 그 과정에서 상부와 갈등도 겪게 된다.

하지만 유진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어떤 곳도, 어느 누구도 소희의 사건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진 형사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다음 소희의 작중 시간적 배경은 2016~17년이다.

그러니깐 주인공 소희가 3학년이 되어 실습을 나간 시점이 2016년이다.

2016년 노동 현장의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7년이 지난 지금은 좀 다른가?

앞서 부당한 고통에 대해 말하면서.

오늘날은 회사에서 고용주가 부당한 짓을 하면 당연히 공정거래위원회에 재소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장이 갑질을 해 대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바로 올려야 하고, JtbcMBC 방송사에 제보하고, 그다음에는 인권위에 고소해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제보하고 게시판에 올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잘못된 점이 고쳐지던가?

간혹 개선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요즘은 너무 많은 제보 때문에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그 많은 제보만큼의 거짓 제보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부작용이 생길 지경이다.

어떤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라도 끌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욱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삶의 현실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법적인 부분, 제도적인 부분은 그것대로 논의하고 살펴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억울함을 보게 되었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낮을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억울하고 부당한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살펴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부당하게 고통받는 낮은 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

그리기 위해서 먼저 관심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에, 모든 억울한 일을 다 알 수는 없다.

알지도 못하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태반이다.

하지만 관심을 가진다면 좀 더 많은 일을 알 수는 있다.

조금만 더 눈을 돌리고,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알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약한 나에게 관심 가지셨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자.

그 사랑으로 억울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내자.

혹시라도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가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부당한 고통, 억울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주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그 사람에게 관심 가지고,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작은 힘을 보태어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힘들 때, 말씀으로 함께하시며 위로하신 주님처럼.

나도 부당한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내 이웃과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참된 선임을 믿고 확신한다.

낮은 곳으로 향하신 예수님의 시선, 그곳을 걸어가신 주의 발걸음과 손길을 닮아가는 우리이길, 사람이교회 공동체이길 관심으로 사랑을 전하시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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