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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0 베드로, 고난을 논하다-베드로전서(I)

착하게 사는 것 밖에는...(베드로전서 2:11-12)

by TwoTalents 2023. 11. 26.

제목 : 착하게 사는 것 밖에는...

 

본문 : 베드로전서 2:11~12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말씀 :

가시적인, 그러니깐 눈에 보이는 성장만을 추구해 오던 한국기독교는 90년대부터 그 부작용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더 도덕적이지 않고, 법을 잘 지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종교 혐오주의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고,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오늘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는 교회가 비난받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믿는 사람들이 사회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에 대하여 권면하는 말씀이다.

특별히 성도들이 사회에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와 성도가 갖는 사회적인 위치에 대해 밝히고 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어해야 할 것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도들이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그들의 삶이 어떠하냐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성도들이 삶 속에서 나타내는 갖가지 행동들이 불신자들에게 비방 거리를 제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본문과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예수님께서도 하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는 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럼, 이 말씀은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는 자들의 악한 행실을 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비방과 저주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나님께 저주가 되는 것이 맞는가?

너무나 당연한 질문인가?

그렇다면, 이 당연한 질문에서 생각해 볼 때,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하나님께 영광인가? 하나님을 비난받게 하는가?

오늘, 나의 삶을 진실하게 돌아보고, 나아가 현재 한국기독교 전체가 직면한 상황이 어떠한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본문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한다.

이는 베드로 당시에 베드로의 편지를 읽게 될 모든 크리스천을 향한 말이라고 생각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를 받게 될 모든 크리스천을 향해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지칭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거류민은 남의 나라 영토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제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거류민 생활을 했다.

크리스천들의 이 땅에서의 위치가 그와 같다는 말이다.

개역한글 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거류민대신 행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크리스천의 위치가 이 세상에서 어떻다는 것인가?

이 땅에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땅은 우리의 나라가 아니며 잠시 머물러 있는 곳이다.

그저 지나가는 곳이라는 말이다.

또한 나그네라고 말한다.

나그네는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거나, 여행 중인 사람을 뜻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잠시 본향을 떠나 이 땅에 임시로 머물면서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종합하면.

이 땅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잠시 머무는 임시적인 곳, 고향을 떠나 여행하러 온 곳, 곧 지나갈 그런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착각하며 살아간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남의 땅이요, 여행 온 곳이며, 곧 지나갈 곳인데,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렇게 무리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자꾸만 이상한 짓을 한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에게 이 세상은 결단코 목적지가 아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가 지나갈 곳이다.

마치 여행 온 여행지와 같은 곳이다.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는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영원한 천국이다.

 

레위기 25:23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민족을 이 땅의 거류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늘날의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나그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이 땅에 대해서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 땅에서의 인간적인 성공과 승리에 목멜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살펴 찾아야 한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참된 우리의 목적이며, 이를 알고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정말 아름답고 귀한 삶이다.

그렇기에 사도 베드로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땅의 거류민인 우리에게는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그네인 우리가 이 땅에서 명예를 쌓고, 물질을 쌓는다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명예와 물질이 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이 세상에서의 높은 위치를 위해 명예를 세우고 물질을 모은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위인 것이다.

성도가 육체의 정욕대로 산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과 그저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이 우리의 영혼을 거슬리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거슬린다는 말은 대적해서 싸운다는 말이다.

육체의 정욕이 우리의 영혼을 대적해서 싸운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공격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정신, 생각을 좀먹고 황폐하게 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이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제어하지 못하는 육체의 정욕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아주 멀게 만들어 버릴 뿐이다.

야고보서 41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육체의 정욕은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나쁜 욕심이다.

성도는 이런 육체의 정욕을 잘 제어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자기 자신 속에서 싸우는 두 가지 자아에 대해서 언급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과 육신의 법을 좇아 살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이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724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나그네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없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우리이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헛된 욕심 때문에 우리 영혼이 좀먹는 어리석은 일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오히려 그것을 제어하고 이기는 용감하고 지혜 있는 우리이길 간구한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아무래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을 향해 악행을 한다고 비방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오늘날처럼 몇몇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가짜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실제로 악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은 악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놓는 사랑을 가르치셨고, 또한 그것을 직접 실천하셨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 오해받을 행동으로 기독교가 비방을 받는다면 이것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기독교가 비방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고 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시고,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인간의 죄가 사하심을 받았고, 이제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이런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그리스도인의 악행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 문이 닫혀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선적으로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악행이 오해든 진실이든 그것을 풀어주기 위한 해결책으로 베드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베드로는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말한다.

당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악행으로 인해 비난받고 있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름마저 비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큰 선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선한 일을 하고도 욕먹을 수 있다.

한 번 나쁘게 보였기 때문에, 이제는 무슨 행동을 해도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가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중적이라고 또 비난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선한 행실밖에 없다.

두 배, 세 배의 노력으로 선한 행실을 해야 한다.

몸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말로 하면 이제는 그저 비겁한 변명이 될 뿐이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다른 방법이 있는가?

오래 참음과 인내로 꾸준히 선한 행실을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

그때 결국 그리스도인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비방하던 입술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입술로 바뀌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마무리.

오늘 본문의 상황이 오늘날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한 것 같다.

사실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난 이후에, 한국에서 지금처럼 기독교가 조롱과 비난을 많이 받은 적은 없을 것이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비난한다.

선한 행실이 없다고 조롱한다.

그저 선한 행실만 없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악한 행실이 난무한다.

사회를 생각지 않고,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집단.

그렇다고 한국 교회 전체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만 생각한다.

예수께서 보이신 희생의 사랑은 고사하고,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들만 살려는 독선적인 사람들.

언제부터인가 개독교와 개먹사들은 한국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집단과 직업으로 항상 3순위 안에 들어가고 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몇몇 성도의 잘못된 행실이 전체 그리스도인의 것인 양 싸잡아 비난받는 것이라고 변명하며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비겁한 변명이 이제는 안쓰러워 보인다.

정말 끝까지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더 한심하고, 더 어이없는 사건이 또 발생하고, 다시 발생한다.

80년대 중반부터 40여 년 동안, 기독교는 바닥을 치다 못해,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가 버렸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를 멈추셨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들의 인식을,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되든 안 되든 해야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되고’, ‘안 되고가 문제가 아니다.

하냐?’, ‘안 하냐?’가 문제이다.

베드로가 제시한 그 일차원적인 방법, 그 방법밖에 없다.

행실을 선하게 해야 한다.

40여 년 동안 이미지 말아먹었으니, 그것을 회복하려면 80, 아니 10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하늘의 소망을 둔 사람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가식이어서는 안 된다.

먼저 내가 진실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가 진실로 이 땅의 거류민, 세상의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과 목적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으로 인한 진실한 삶, 신실한 선행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살아생전에 기독교가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래 말씀하셨던 삶, 가르치셨던 삶, 보여주셨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일이다.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르기를 소원한다.

세속의 세상과 다르기를 소원하고, 몇몇 거짓된 그리스도인들, 그 가짜들과 다르기를 소원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착한 행실로 주님의 영광이 되는.

그러한 믿음, 그러한 삶의 사람이교회가 될 수 있기를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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