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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0 베드로, 고난을 논하다-베드로전서(I)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베드로전서 3:13~22)

by TwoTalents 2023. 12. 31.

 

제목 :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본문 : 베드로전서 3:13~22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말씀 :

오늘 본문은 2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313~17절까지 말씀은 선을 위해, 의를 위해 고난받는 성도의 삶이 나타난다.

나머지 318~22절까지는 선을 위해, 의를 위해 고난받는 성도의 삶이 왜 복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2부분 모두 공통으로 강조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선한 양심이다.

의를 위해 고난받는 성도의 삶은 선한 양심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선한 양심으로 의를 위해 고난 받았기에 그 삶이 복된 삶이 되는 것이다.

 

먼저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열심히 선을 행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해도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합당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선을 행하는 자가 오히려 바보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베드로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앞서서 이미 당연한 벌보다는 선을 행하다가 고난받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14절에 다시 한번 이렇게 전한다.

본문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성도들의 복됨을 다시 강조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즉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똑같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한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 육체에 속한 것에 관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고난과 고통,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하늘에 소망이 있기에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고,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기에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과 똑같은 두려움이 우리에게는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질문할 수도 있다.

본문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왜 두려워하지 않는 지를 질문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이 땅에서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질문에 대해 성도는 자신의 소망에 대해 전할 수 있는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전한다.

천국을 향한 소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그러면서 담대히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이 땅에서의 고난, 의를 위해 받는 고난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실제로 이 땅이 아닌 하늘의 소망을 두는 삶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먼저 주를 향한 확실한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이 외적인 행동에 앞서 내적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

본문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겉모습만 흉내 내는 삶이 아니라 실제 마음과 생각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선한 양심이라고 말하고 그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모든 인간은 양심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말하는 선한 양심은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양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에 감동받아 진짜로 변화된 양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는 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거짓 없는, 가식이 아닌 선을 행하여야 한다.

혹여라도 가식적이고, 보이기 위한 선행이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머지않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사람들은 결코 참된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비난이 더 커질 뿐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원하시지 않는 모습이다.

거짓말고, 사기인데 그것을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용납하신단 말인가?

성도들에게는 선한 양심에서 일어나는 진실한 선행, 마음에서 우러나는 참된 선행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의 비방이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2장에서 나누었던 권면을 다시 한번 전한다.

본문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억울한 고난이, 당연한 고난보다 훨씬 낫고,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억울한 고난이 되려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진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

선을 행하는 척이 아니다.

 

그렇다면, 억울한 고난이 왜 더 나은 것인가?

베드로는 이에 대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소개한다.

본문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셨다.

예수님에게는 가식이 없었다.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셨고, 자신을 모함하는 인간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도, 패배도 아니었다.

오히려 억울함 중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신 주님의 놀라운 승리였다.

주님은 자신과 같이 의를 행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불의한 자들을 버리실 것을 말씀하셨다.

의를 행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고난 속에서 육체는 죽임을 당할 수 있지만, 그 영혼은 풍성함으로 살리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처럼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19, 20절은 베드로전서에서도 가장 난해한 말씀이다.

본문 19, 20.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말씀 때문에 예수께서 노아 시대 죽었던 영혼들을 찾아가 선포하시는 것으로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미 죽은 자들의 두 번째 기회에 관한 말씀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승리의 선포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방주는 두 번째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나타내는 말로 봐야 할 것 같다.

노아가 1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방주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을 것이다.

그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끝내 방주를 통해 홍수에서 구원받은 이는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다.

이렇듯 홍수, 즉 물은 노아 가족에게는 구원의 표와 같은 것이었다.

본문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는 노아 홍수의 물을 세례와 연결시킨다.

홍수가 노아 가족에게 구원의 표가 된 것처럼, 성도가 세례받는 것으로 구원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례 자체가 구원을 이루는 필수 조건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입술로 고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주님처럼 살겠다는 다짐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제 18절에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완성을 이야기한다.

본문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억울하게 고난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이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셨다.

베드로전서를 기록하고 있는 베드로는 이 일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이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모든 영적 존재들을 향한 주권자로 그들을 복종케 하신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셨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선한 양심을 가지고 가식 없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당신의 길을 따르길 원하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믿는 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 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추구하며 나아가는 목적과 믿는 자들이 추구하며 바라는 소망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최종적으로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이 땅이 전부이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 너머의 세상, 주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과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성도들과는 영적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

세상 사람들처럼 그들과 멱살 잡고 같이 싸워야 하는가?

주님은 성도들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고, 의를 지킬 것을 말씀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공격한다고 같은 방법으로 공격하고, 같이 욕하고, 같이 고통을 주지 말라고 하신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를 공격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의를 행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승리는 불의하게 나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승리는 불의한 공격을 당하는 중에도 선한 양심을 지켜 선을 행하는 나에게 주어진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달아 마음에서부터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 삶, 우리 생각, 우리의 모든 것이 선하신 주님을 닮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처럼 고난받아도, 주님처럼 이겨내고, 주님처럼 승리해서, 주님처럼 부활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선한 양심을 품은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참되고 선하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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