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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0 베드로, 고난을 논하다-베드로전서(I)

세상 권력에 대하여...(베드로전서 2:13~25)

by TwoTalents 2020. 7. 4.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세상 권력에 대하여...

 

본문 : 베드로전서 2:13~25

13.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말씀 :

베드로는 이 땅의 삶이 믿는 이들에게는 나그네의 삶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나그네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가져야 할 합당한 삶의 자세에 대해 설명한다.

본문 13, 14.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먼저 베드로는 세상의 제도와 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오직 주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서이다.

혹시라도 세상에서 합의로 이루어진 합당한 제도를 믿는 자들만 거스르는 것으로 책잡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종에도 베드로는 분명히 전제하는 것이 이다.

그 권력은 합리적이고 정직한 권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악행하는 자에게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에게는 포상하는 온전한 권력이어야 한다.

악행 하는 자를 포상하고, 선행하는 자를 징벌한다면 그들은 정직하고 합당한 권력이 아니다.

잘못된 권력에 빌붙어서 그들의 악행에 그리스도인이 동참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내 이웃을 향한 사랑도 아니다.

악행 하는 권력에 빌붙는 것 자체가 바로 악행이다.

 

베드로는 믿는 자들의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행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선행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본문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선한 행동으로 혹시라도 있을 억지스러운 주장에 책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혹시라도 있을 사람들의 중상모략을 사전에 막을 수 있도록 흠이 될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의 눈을 너무 의식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비판과 비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고 있다.

결코 하나님의 뜻도 아닌 행위를 하면서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자유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믿는 자들은 오직 주 안에서 자유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자유가 우리의 악행을 가리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본문 16, 17.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믿는 자들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죄를 막 저질러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 잘 살려고 하다 보니 죄를 짓게 되고 끝내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천국에 소망을 두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더 잘살려고 죄를 의지하고, 죄에 붙잡혀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를 안 지어도 되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믿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뿐이다.

자유함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인간을 공경하고,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합당한 권력을 존대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권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 종의 신분, 노예 신분으로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한다.

본문 18~20.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당시의 종들은, 노예들은 당연히 주인에게서 고난받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런데 그 고난이라는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면, 그것은 억울한 것도 아니고, 참는다고 칭찬받을 것도 없다.

이것은 고난이 아니다.

단지 벌 받는 것이다.

하지만 부당한 고난, 그러니깐 주인이 오해했던지, 아니면 화풀이로 그랬든지 그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면, 그것을 참고 견딜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가르침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해서, 세상의 권력이나, 고용주가 악행을 하더라도 그저 참으며 견디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 본문의 주된 요지는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노예가 주인에게 징계를 받을 때, 실재 잘못 때문에 벌을 받는 것과 잘못이 없지만 고난받는 것과는 하나님 앞에서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들조차도 선을 행하라는 말이다.

이는 지극히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전해진 메시지이다.

당시의 종이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서 어디에 가서 그것을 호소할 것인가?

아무 데도 없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나쁜 생각이나 극단적인 생각 말고, 계속해서 선을 행하며 잘 견뎌내라는 말이다.

 

오늘날은 회사에서 고용주가 부당한 짓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공정거래위원회에 재소해야 한다.

사장이라고 갑질을 하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가장 먼저 올리고, JtbcMBC 방송국에 제보하고, 그리고 고소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당연한 징계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베드로는 당시 종이나 노예들이 받았을 억울한 고난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심을 전한다.

본문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왜 예수님께서 잘 알고 계시는가?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동안 오해받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그 죄를 대신 지시고는 너무나도 참혹한 고난을 받으시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런 주님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을 예수님처럼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주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을지언정, 그것이 정말 죽을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억울한 고난과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본문 22~24.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그 입에서 거짓을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억울함 속에서도 고난과 죽음을 감당하셨다.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해서 세상과 똑같은 모습은 부당하게, 악을 행하고, 있는 그대로 갚아주는 행동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렇게 해야 인간을 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고 채찍을 맞으셨다.

그의 억울함이 우리에게 나음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억울한 고난 중에도 선을 지키신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본문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전에 인간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목자 없는 양은 목적지가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는 곳에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단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짐승들로 인해 두려움에 떨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원래 목자가 다시 세워지신 것이다.

이제 양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목자를 따라 양을 기다리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도 없다.

무서워할 것도 없다.

오직 목자 되신 주님께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나라가 부당한 권력으로 참 자유가 없던 시절 목회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악용된 많은 말씀 중 하나이다.

많은 목회자가 이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고 설교하면서 부당한 정권, 합당하지 않는 권력에 복종할 것을 가르쳤다.

믿는 자들이 해야 할 것은 단지 권력을 위해 기도하고, 그 권력에 순종하면서 권력과의 그 어떤 갈등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결코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권력에 대항하라는 말도 아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믿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삶에서 선을 행하라는 것이었다.

벌을 받아도 억울한 벌이어야지, 당연한 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억울함을 다 견디셨기 때문에 죄 사함을 이루신 것이 아니다.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선하신 뜻을 유지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베드로는 이땅의 삶을 나그네의 삶, 행인의 삶이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왜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가르쳤는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나그네가 자신의 본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어리석고, 많은 불법을 동원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우리의 목적지를 기억하고, 그곳을 소망하며, 그곳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춰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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