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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8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며(갈라디아서)

같은 복음, 다른 부르심.(갈라디아서 2:1~10)

by TwoTalents 2020. 5. 25.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베드로와 바울)

제목 : 같은 복음, 다른 부르심.

 

본문 : 갈라디아서 2:1~10

1.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말씀 :

우리는 지난주 말씀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호하고 증거하는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다시 한번 자신의 사도직분과 복음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음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던 이력을 밝히고, 다른 사도들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때 이루어진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 간의 상호적 사역의 인정함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그 사역과 복음이 확증되고 인정되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15일간의 짧은 교제만을 나눈 뒤, 대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야만 했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후에 바울은 다시 한번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

본문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바울은 바나바,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방문하였다.

바나바는 바울은 물론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좋아하는 유대인 사역자 중 한 명이었다.

디도는 헬라인으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다.

바울의 동행이 인정받는 유대인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본문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이 방문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제시하게 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지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사역과 복음을 허락받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을 세우시고, 바울에게 사명을 주신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제시한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이다.

같은 복음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불미스러운 오해와 더 이상의 갈등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사역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을 제시받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바울의 복음이 자신들의 복음과 같은 복음임을 인정하였다.

본문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의무화하지 않았다.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중점적으로 공격받은 부분이 이 부분이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을 제시받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바울과 함께한 이방인, 즉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과 핵심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방인들에게는 바울이 전하는 방식이 맞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인정하는 복음을 자기 임의대로 공격하는 가짜들을 향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 낸다.

본문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방인 성도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교회로 잠입해 들어온 거짓 형제들, 가짜들의 헛된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그 자유를 빼앗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성도들이 자유인이 되었다.

그런데 다시 율법과 형식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사악한 계교를 부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을 향해 거짓 형제라고 지칭한다.

그들을 형제라고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울은 원수는 사랑해도 이 거짓 형제들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예수님의 사역에도 나타난다.

마태복음 715~18.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거짓 선지자들, 가짜들을 향해 삼가라고 주의를 주신다.

본문의 삼가라는 헬라어로 프로세코라는 말로 주의하다’, ‘조심하다’, ‘경계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가짜 선지자들에 한해서는 주의하고, 조심하고, 경계해서 멀리하라는 뜻이다.

바울이 말하는 거짓 형제들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선지자들은 같은 맥락의 가짜들이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원수는 사단이나 마귀와 같은 영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육적으로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육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나를 핍박하고,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 원수가 나에게 미칠 수 있는 부분은 오직 육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저지르는 죄를 알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돌이켜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복음을 변형시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이나 말씀을 변형시켜 사기 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은 나의 영적인 부분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자기도 앞을 보지 못하면서, 같이 죽자고 나를 붙들고 절벽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들에게 미혹되었다가는 내 육체가 아니라, 내 영이 죽게 된다.

바울의 표현처럼 영으로 시작했는데, 구원을 다 빼앗기고 육으로 끝나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원수보다 더 나쁜 존재이다.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나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덤벼드는 사악한 무리들, 독사의 자식들, 마귀 새끼에 지나지 않는 존재들이다.

 

바울은 이러한 가짜들과는 결단코 타협이 없음을 선언한다.

본문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본문의 복종을 헬라어로 휘포타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단순히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속됨을 나타낸다.

그러니깐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거짓 형제들의 가짜 복음을 수용하지도 않았고, 받아들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양보하고 타협해서 일부라도 받아들이는 일도 있을 수 없다.

? 그들의 복음은 믿음의 형제를 죽이는 것이 때문이다.

오직 참된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형제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순수한 복음 그 자체를 받아들였다.

거기에다가 어떤 사족도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본문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어떤 조건이나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

부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과 다르지 않고 같은 것이 때문이었다.

그러니 따로 변형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될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본문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두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본질이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방법과 형식에서 차이가 날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권 역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본문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와 바울은 대상이 다를 뿐 같은 복음을 전했다.

마찬가지로 부르심의 형태만 다를 뿐, 같은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은 동등한 권위를 가진 사도인 것이다.

단지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그 부르심의 목적이 다를 뿐이다.

 

바울은 사도권에 대한 이런 자신의 주장이 단순히 자기만의 주장이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본문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서 기둥같이 여기는이라고 표현했듯이,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당신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고 따르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다.

이런 그들이 주님께서 베푸신 바울을 향한 은혜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도권을 수용하여 악수를 청하고, 오히려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사역을 응원하고 기도하며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니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야고보가 파송해서 왔다고 말하면서 다른 복음, 가짜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다.

가짜들을 멀리하고, 삼가라는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원래 복음으로, 제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여러 목회자의 설교나 유력한 주석에서 마저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의 갈등을 믿음과 행위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행위를 선한 것, 윤리적인 것, 도덕적인 것,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연결시켜 버린다.

그러면서 선한 행동을 하고, 도덕적이며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설명해 버린다.

맞다.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맞다.

그런데 애초에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의 갈등을 믿음과 사랑이 동반된 선한 행위의 대립이라고 정의 내린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도 밝혔지만,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 선한 행위, 도덕적 행위가 아니다.

지극히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유대교의 종교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도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쳤더니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을 했던 인간들이 율법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물어보지 않았는가?

 

오히려 선한 행위, 사랑의 행위는 바울과 그 일행이 일상적으로 해오던 일이다.

본문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 교인들에게 그 어떤 의무도,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한 형제, 자매임을 인정하면서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 그 성도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에 대해 바울은 본래부터, 평소에, 언제나 어려운 형제, 자매를 사랑으로 돕는 것에 힘써 왔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자신 믿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평소에 실천하고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유대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행위를 오늘날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말씀을 마무리하려 한다.

 

주일에 자동차를 몰고 교회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도로 한 쪽에서 스러지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누가 봐도 위급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 율법주의자들, 형식주의자들이 원하는 행위라는 것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냥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 것이다.

스러진 사람을 돕는 것보다 거룩한 주일에 예배하러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당연히 유대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예배하러 교회는 가야 하니깐 운전하면서 전화로 119에 신고해주면 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은 이런 소극적인 행동이 아니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스러진 그 사람의 상태를 보고, 119가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될 상태이면 신고를 한 다음에 그 사람이 엠블런스를 타고 갈 때까지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만약 위급해서 119를 기다릴 상황이 아니라면, 그분을 내 차에 태워서 비상등 깜박이며 병원까지 함께 가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 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변형된 가짜 복음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은 감춰 버리고.

주일에 교회 나와서 예배만 잘 참석하면.

달마다 십일조만 꼬박꼬박 내면.

때마다 절마다 목회자에게 선물 갖다 주면서 주의 종을 잘 섬기는 척하면.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복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거짓 형제이며, 거짓 선지자이다.

이들을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결단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그냥 그렇게 형식만 지키는 것은 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배든, 십일조든, 섬김이든, 그 모든 것은 오직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함으로 예배하고, 사랑함으로 헌금하고, 사랑함으로 섬기고, 사랑함으로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고, 그 믿음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 공동체 여러분.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같은 복음이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바로 사랑이다.

그 사랑의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 기막힌 복음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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