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48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며(갈라디아서)

믿음으로 구원 받음.(갈라디아서 2:15~21)

by TwoTalents 2020. 6. 9.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믿음으로 구원 받음.

 

본문 : 갈라디아서 2:15~21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 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말씀 :

바울은 지난주 본문 말씀에서 선배 사역자인 베드로를 책망했던 사실을 밝혔다.

베드로가 스스로 받았던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위선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대두된 문제가 구원이 율법으로냐?’ 아니면 믿음으로냐?’ 였다.

 

이제 바울은 15절부터 본격적으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전하게 된다.

만약 갈라디아서를 첫 번째 바울 서신으로 인정한다면, 이 부분이 이신칭의가 이론적 가르침으로 전파되는 최초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바울은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이야기한다.

본문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이것이 선민사상에 의한 유대인들의 세계관이었다.

세상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신들과 그렇지 못한 이방인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구원도 율법을 받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과는 상관없다는 것이 유대인의 사상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유대인의 세계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본문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절은 이신칭의에 관한 첫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완전한 부정해 버린다.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켜 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음을 전한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완성품이 아니다.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오직 예수님의 성육신, 메시아 사역,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완성인 율법, 과정으로의 율법으로는 사람이 완전하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말씀을 통해 율법의 역할을 정의한다.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행동을 다시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본문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앞서도 말했듯이 베드로가 이방인을 향해 부정하지 않다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회의를 통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어떤 율법적 짐을 지우지 않을 것을 결의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안디옥에서 율법주의자들의 눈이 무서워 이중적인 행동을 해버린 것이다.

주님이 괜찮다고 했는데도, 율법주의자들의 죄라는 말을 듣고 그들의 주장을 따랐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을 괜찮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되어 버린다.

예수님께서 죄를 죄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신게 된다.

자신의 제자인 베드로를 미혹해서 죄짓게 만든 이상한 스승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상황이 합당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 이야기도 한다.

본문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바울은 율법을 헐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율법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도한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율법에 얽매이고, 율법을 세우고 따른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기 스스로를 위선자로, 거짓말쟁이로, 주님 앞에서 범법자로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예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렸다고 고백한다.

본문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자신은 이제 율법에 대해서는 죽음 사람이고,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살기 위함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역설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깐 율법주의, 형식주의는 그럴 수도 있고, 나와는 다른 것이니 인정해 주고, 그렇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 안에서 살려면 반드시 율법과 단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주의, 형식주의가 많은 신앙의 모습 중 하나로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살려면 무조건 배척해야 하는 모습이 율법주의이고, 형식주의인 것이다.

결국, 율법주의, 형식주의는 나를 죽이고, 내가 하나님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죄악 된 사상인 것이다.

 

바울은 율법주의, 형식주의 맹신자였던 자신이 어떻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를 이렇게 고백한다.

본문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앞에서도 밝혔듯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으로,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인한 것임이 확정되었다.

과거의 형식은 죽고, 새롭게 믿음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런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옛사람의 죽음과 동일시 하고 있다.

율법의 행위로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던 과거의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렇게 옛사람이 죽는 것으로 바울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옛사람의 죽음은 오히려 바울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였다.

이제 바울은 과거와 같이 율법에 따른 삶을 살지 않는다.

바울을 사랑하사 바울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바울은 이 은혜를 결코 폐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본문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고, 형식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율법에 의해,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인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이 되어 버린다.

헛되이 죽은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실 것이 아니었다.

거리로 나가 율법 잘 지키라고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맞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율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율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무엇보다 모세의 율법 자체가 과정이고 미완성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베드로와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율법주의, 형식주의의 폐단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이유를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불완전함과 함께 못 박혀 죽으셨다.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믿음의 완전함을 완성하셨다.

이제는 이 복음을 믿는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하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삶은 율법 아래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

율법에는 생명이 없다.

율법은 과정이고, 미완성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목숨 바쳐 이루신 자유를 다시 율법 아래에서 제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모습인 것이다.

의롭다 하심이 율법으로도 가능한 것이라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자체가 쓸데없는 죽음이 되어버린다.

예수님께서 죽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목숨 바쳐 전도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참된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믿음을 통해 주어졌던 성령의 은혜가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육체의 삶으로 뒷걸음질을 해버린 것이다.

바울은 이런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참된 복음을 다시 한번 전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올바른 구원의 길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공동체 여러분.

그 옛날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한 형벌만이 우리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으로, 그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께서 주신 영으로 다시 살아났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형식에, 제도에, 율법에, 의식에.

이런 것에 함몰되어 참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영으로 시작했는데, 육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바울이 절규하며 외치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람이교회'는 온라인교회입니다.

교회 등록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saramichurch@naver.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