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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19 호흡이 있는 자마다(시편)

불평에서 찬양으로...(시편 13편)

by TwoTalents 2020. 5. 13.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불평에서 찬양으로...

 

본문 : 시편 13편.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말씀 :

시편 13편은 다윗의 시이다.

다윗이 이 시를 어떤 배경에서 지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시편 13편 여섯 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편이다.

그런데 이 짧은 내용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시편의 첫 내용을 보면 다윗이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다윗이 눈앞에 죽음을 둔 것처럼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 가서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이 표현되어 있다.

단 여섯 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편이 통곡으로 시작해서 기쁨과 찬양으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윗에게 일어난 이런 변화의 이유가 무엇이며, 이 변화는 다윗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다윗은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다윗은 탄식으로 시편 13편을 시작한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이 1절과 2절에서 모두 네 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윗은 지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이 빨리 좀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한탄을 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영원히 잊으시니이까?’라며 질문을 한다.

다윗은 대적들은 승승장구하고 득세하는데, 자신은 극심한 근심 속에 있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잊으심이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크게 염려하며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다윗이 탄식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느낌이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며 계속해서 하나님께 질문한다.

주의 얼굴이 숨겨졌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니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 너무나도 크고 가혹한 일이다.

다윗은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를 직역하면, ‘내가 나의 영혼 속에 생각을 두었고’가 된다.

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깊은 생각에 빠져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처럼 자신의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다윗이 이렇게 근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이런 다윗의 형편을 보며 원수들은 기뻐했던 것이다.

다윗은 이런 원수들의 모습 때문에 더욱 힘겨워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한다.

본문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이제 다윗은 고민하고 탄식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자신의 형편을 가감 없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하시고, 응답하시고, 눈을 밝혀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낀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동정과 주목을 끌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눈의 밝음이 구약에서는 종종 사람의 건강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질병으로 인한 슬픔 때문에 흐려진 눈을 밝게 해 달라며 탄식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다윗은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자게 될지도 모르는 두려움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극도로 악화된 건강상태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적 고통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다윗은 죽음에 가까이 있다고 느낄 만큼의 고통 속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윗은 이런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아뢰며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본문 4절.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원수’나 ‘대적들’은 모두 다윗의 정적 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원수’는 단수형이다.

그런데 ‘나의 대적들’은 복수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 단수와 복수의 차이점 때문에 원수와 대적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니깐 단수로 언급된 ‘나의 원수’는 인생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복수로 언급된 ‘나의 대적들’은 다윗의 일반적인 정적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해석이든 두 단어 모두 다윗의 정적을 나타내는 것임은 분명하다.

다윗은 하나님께 택하신 자신의 무너짐을 원수와 대적들이 기뻐하지 않겠느냐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전환되는 고백을 하게 된다.

본문 5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구원의 기쁨이 등장한다.

다윗이 지은 시편에는 이런 식의 서술 방식이 자주 등장한다.

어려움 속에서 간구하다가 바로 확신으로 전환해 버리는 것이다.

다윗의 많은 시가 이런 구조를 보인다.

다윗은 오직 주의 사랑하심을 의지한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사랑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한다.

다윗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자신에게 약속하셨던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큰 고통에서 그대로 머물지 않고, 갑자기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현듯 함께하셨던 지난날을 기억나게 하셨거나,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건 다윗의 마음은 벌써 주의 구원을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윗에게 확고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의 구원이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확고한 소망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로마서 4장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이런 믿음이 다윗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다윗의 믿음이 극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다윗은 이런 확신 속에서 시편의 마지막을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6절의 고백은 처음 1절의 고백과는 완전히 반대의 고백이다.

다윗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그로 인해 탄식에서 찬송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결국, 다윗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덕을 베푸실 것을 확신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은덕을 베푸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말’이란 단어이다.

이 말의 뜻은 ‘보상하다’, ‘갚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선과 악 모두에 적용되는 말이다.

즉, 선이든 악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갚아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확신을 지킬 때, 반드시 그 고통에 대한 것을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다.

주님의 갚으심은 인간의 어떠한 공로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와 함께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말씀하셨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께 불평하는 기도를 올릴 수 있다.

우리의 형편이 매일 매일 좋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전혀 흔들림 없이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나도 모르게, 때로는 알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내 입술에서 고백 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중에도, 불평 중에도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을 찾고 느껴야 한다.

주님의 약속이 생각나야 한다.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앞으로 이 땅이 아닌, 천국에서 어떻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가 기억나야 한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입술의 말이 불평에서 찬양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참믿음이며, 세상에 대한 승리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허락하시기를 간구한다.

다윗처럼, 불평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이 생각나기를 소원한다.

그로 인해 한마음 신앙공동체의 모든 가족들은 슬픔과 근심 속에서도 결국은 주님을 찬양하며, 주안에서 기뻐하며, 주로 인해 즐거워하는….

그러한 고백이 우리 입술에 넘쳐나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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