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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

영적도해

by TwoTalents 2017. 8. 23.

영적도해 (Spiritual Mapping)의 정체

 

 

몇 년전 봉은사 절에 기독교 교인들이 들어가 땅밟기기도를 하여 큰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다. 결국은 책임자가 봉은사에 공식사과를 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많은 기독교의 학자들과 교수들은 기독교 언론사에 그 땅밟기기도가 무속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이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물론 필자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그 교회의 터에 땅밟기 기도를 하는 단순하고 상징적인 기도까지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조직적으로 땅밟기를 주요교리나 방침으로 채택하는 단체에서 그 배후사상은 단순하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특히 청년들이 단기선교라는 이름으로 몇백만원을 지불하고 이스람교를 믿는 중동지역을 가서 땅밟기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행위가 과연 선교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땅밟기를 하고 오면 지역귀신들이 쫓겨가서 기독교가 전파되는가? 그러한 선교 단체들이 주장하는 땅밟기운동의 배후에는 이원론적인 지역귀신에 의한 영적도해 사상이 숨어 있으며,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1) 지역신과 영적도해의 그룹의 시작

신사도운동의 중심적인 인물인 피터 와그너가 훌러신학교의 교회성장학과의 교수로 있을 때에 존 윔버를 만나 빈야드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캔서스시티예언자그룹(KCF)이었던 마이크 비클과 밥 존스를 만나게 됨으로 예언사역을 접하게 된다. 그 이후에 피터 와그너는 이러한 예언운동과 빈야드운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서 신사도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 1989년 봄에 나는 영적전쟁과 함께 예언사역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존 윔버, 신디 제이콥스, 폴 케인 등을 다소 의심했다. 그러나 이들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분야에 대해서 깨닫게 해준 사람들이다. 예언이야말로 중대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기도는 전투다, 피터 와그너, 44쪽)

그런데 신사도운동의 주요한 사상이 또 하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영적도해 사상이다. 피터 와그너는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별로 개의치 않고 모두 수용하는 관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제1차 로잔회의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많이 참석한 회의였지만, 1989년 제2차 로잔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과반수 이상이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회의를 통하여 피터와그너는 영적도해에 대해서 발을 딛게 된다.

- 2차 로잔회의는 보수주의와 오순절주의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1974년의 1차 로잔회의는 오순절이나 은사주의자들이 참석하는 정도였지 어떤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으나, 15년 후의 2차 로잔회의에서는 경우가 달랐다. 2차 로잔회의 참석자의 과반수 이상이 오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기도는 전투다. 피터 와그너, 45쪽)

2차 로잔회의에서 소위 영적도해의 주장들이 나타나며, 피터와그너에 의하면 다섯팀의 워크샵에서 지역귀신과 전략적 수준의 중보기도에 관한 세미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1990년 2월 12일 캘리포니아 파시데나에서 첫모임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 모임에 참석한 자들이 존 도우슨, 신디 제이콥스, 조지 오티스, 루이스 부쉬등이었다. 피터 와그너는 조지 오티스, 신디 제이콥스등 몇사람이 함께 <지역사회에서 마귀의 진을 헐라>라는 책을 공동저술하기도 한다. 존 도우슨은 예수전도단의 세계총재이며, 실제로 예수전도단에서는 밥 베켓의 영적도해에 관한 책도 출간하고 있는데, 그 책들은 WLI(와그너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 이 과정이 시작된 것은 흔히 2차 로잔회의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세계복음화 회의에서였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로잔위원회는 전 세계에서 4,500명의 지도자들을 초청한 가운데 1989년에 마닐라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적어도 다섯명의 연사들이 다른 참석자들 대부분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그 주제는 ‘지역의 영들’(territorial spirits)이었다. 나도 그 다섯명의 연사들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교회가 바울이 말하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엡6:12)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러한 ‘공중전’이 전세계의 미전도 종족들에게 나아가 사역하는 전도자들, 교회개척자들, 그리고 목사들이 수행할 지상전의 길을 닦기 위해 필요하다고 느꼈다.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129쪽)

이 영적도해라는 논리 자체가 비성경적인 주장으로서 이원론과 무속적인 귀신론을 근거로 한다. 즉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동등한 대결구도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지역귀신들을 땅밟기와 대적기도, 선포기도와 같은 귀신축사로서 쫓아내는 것이 영적도해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영적인 개념은 물질적이고 장소적인 개념에 제한을 받는 이상한 논리이다. 성경에서 전도를 할 때에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던 적은 있지만, 땅밟기를 하면서 귀신을 쫓아낸 기록이 전혀 없다.

특히 2차 로잔회의 이후 오순절교단의 세대주의 신학자인 루이스 부쉬가 10/40창이 미전도종족이 위치한 사각형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10/40창에 지역귀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영적도해 사상이 미전도 지역의 원인이라는 견해가 나타난 것이다. 인터콥의 최바울은 세계영적도해라는 책을 썼으며 지역귀신을 축출하는 방법으로 땅밟기 단기선교를 주장하던 자였다.

- 백투 예루살렘 운동을 통하여 주님의 지상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한국교회가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첫째의 방법은 10/40창을 위한 연합중보기도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현재 10/40창을 묶고 있는 어두움의 세력을 향한 영적인 공중전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나아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강한 자의 세력을 결박하고, 전진하는 영적군사를 후방에서 영적인 포의 지원사격을 하는 것입니다.(인터콥 선교사의 인터뷰 기사)

신사도운동은 이러한 혼합과정을 거쳤다.
신사도운동의 모태는 늦은비 운동(윌리엄 브랜넘, 폴 케인)이며, 캔서스시티예언자그룹(밥 존스, 폴 케인, 마이크 비클)에 이어, 빈야드운동(존 윔버)과 토론토브레싱(존 아놋), 그리고 지역귀신에 대한 영적도해등이 신사도운동을 태어나게 한 유래라고 볼 수 있다. 결국 2000년대에 이르러서, 국제사도연맹(ICA) 결성되어 이 운동을 동조하는 무리들이 모여서 공식적으로 신사도운동이 출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신사도운동은 여러가지 이단성이 있는 단체가 분열되고 다시 연합되는 과정을 거침으로서 이루어진 이단들의 종합백화점이라고 이해하면 분명하다.


2) 영적도해란 무엇인가?

 

영적도해는 신사도운동에서 주장하는 중요한 교리이며, 신사도운동의 영적도해에 관한 책들은 현재 WLI(와그너신학교)에서 공식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간략하게 영적도해를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영역과 사탄의 영역을 지도로 표시하여 그 지역을 다스리는 지역신들을 쫓아냄으로 하나님의 영역을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밥 베켓(영적도해, 지역을 바꾸는 기도), 피터 와그너(지역사회에서 마귀의 진을 헐라), 존 도우슨(하나님을 위하여 도시를 점령하라), 신디 제이콥스, 조지오티스, 루이스 부쉬등이 영적도해를 주장한 자들이다.

영적도해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곧 하나님과 사탄이 이 세상에서 서로 대등한 세력을 갖고 대립하고 있다”는 이방 사상인 헬라적인 이원론에 기초를 둔 것이다. 영적도해를 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역을 정한 다음 땅밟기나 대적기도, 선포기도를 하여 귀신을 축사하면 그 지역의 귀신이 쫓겨나가고 약화되며 하나님의 영역은 반대로 확장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무속적인 사상이며, 기독교의 사상과 다르다.

 

- 다행히도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대적들을 멸하시도록 인도하셨던 옛 언약의 때가 아닌, 새 언약의 때에 살고 있다. 새 언약과 더불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지고 오셨다. 우리의 전투는 더 이상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우리가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으면 이 땅을 다스릴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가 공격적이 되고 원수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이 땅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도미니온, 150쪽) 

 

땅밟기 기도를 하는 인터콥 최바울 지역귀신에 의한 영적도해를 주장한다. 그는 ‘세계영적도해’라는 책을 썼으며 그의 책에는 지역신의 개념이 계속 언급되어 있다.

 

-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상 그 지역들을 장악하고 있는 신들에 대항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지역마다 그 지역을 지배하는 어둠의 영적세력들이 오랜 세월 역사 속에서 강력한 영적진을 형성해 왔습니다(최바울, 백투예루살렘, 70쪽)

 

- 수14:9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가서 밟고 취하면 땅을 다 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땅을 밟고 취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곳의 기득권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세력은 저항하며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곳에 적이 있는 것입니다. 대적이 거기서 호심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저항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둠의 권세가 저항하는 것입니다. 전쟁입니다 (최바울, 왕의 군대, 24쪽)

 

이 전략적 수준의 영적싸움을 신사도운동에서는 ‘예언적 중보사역’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중보자가 신약시대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보기도와 용어는 같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지금도 중보자가 있다고 주장하며 중보기도는 예언적인 기도라고 가르친다, 또 이들이 주장하는 영적전쟁은 선포기도, 대적기도, 귀신축사를 말하며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땅밟기인 것이다.

베뢰아나 신사도운동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며, 마귀를 멸하러 오신 분이다. 영적도해와 백투예루살렘을 주장하는 인터콥 최바울도 동일한 주장을 하는데, 구원을 받는 것 외에 다른 사역이 있다고 한다.

 

-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역사는 인간 개개인을 구원하셨지만,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인간 개개인이 구원 받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권세를 멸하고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역사 이후에도 하나님의 세계경영은 지구영적 전쟁의 차원에서 계속되는 것입니다.(최바울, 왕의 군대, 118쪽)

 

신사도운동의 영적도해, 영적전쟁, 축사, 땅밟기기도, 예언행위, 대적기도, 선포기도는 모두 극단적이며 변질된 세대주의 이원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 걷는 기도와 예언적 행위 : 물론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러나 전투기도는 교회 밖으로 나가 지역사회에서 하는 기도이다. 교회 안에서의 기도는 대부분 목회적인 기도이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의 기도는 사도적이고 예언적인 기도로 바뀐다. 기도는 경계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드리는 기도가 멀리서 드리는 기도보다 정세와 권세를 격퇴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우씬스크레서 중보기도자들은 “몇달 동안 도시 주위를 돌았으며 레닌의 동상 근처에 있는 나우아나 - 로드네 산에서 기도한 것을 포함하여 ‘하늘의 왕후’로 불리는 것에 대항하여 기도했으며, 가능한 모든 종류의 상징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다(이것을 예언적 행위라고 부른다) (피터와그너, 도미니온, 167-168쪽)

 

최근에는 인터콥 외에 예수전도단을 비롯한 많은 선교단체도 땅밟기를 하며, 신사도운동과 함께 집회를 열고 있다.


(3) 신귀신론

피터 와그너는 영적도해와 도미니온사상을 풀러신학교에서 가르치려고 하다가 이단시비에 몰리게 된다.

- 세 번째 단계는 다소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자료들을 나의 신학교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일이었다. 기사와 표적에 대한 초기의 강의를 통해 나는 동료교수의 이해를 상당히 넓혀 놓았다. 그런데 이전의 강의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되어간 이 강의에서 헬라군영과 같은 것을 직접 다루는 사역의 가능성이 제기되자 동료신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을 학생들이 배우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드디어 나를 광신자로 몰기 시작했다. 마침내 보직교수 회의에서는 나에 대한 사실상의 이단재판을 열었다. (신사도적 교회로서의 변화, 131-132쪽)

이 영적도해는 철저한 이원론을 근거로 한다. 즉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 선과 악의 대결구도, 영과 육의 대결구도로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탄을 쫓아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게 된다. 이러한 이원론은 베뢰아나 다락방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병에 걸린 자들과 사탄의 소유된 자들은 악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기도는 전투다, 80쪽)

피터 와그너의 귀신론은 거의 무속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적인 사물에도 귀신이 붙어 있다고 하며, 물귀신도 등장한다.

- 귀신은 우상이나 동물, 집 또는 나무나 산 등의 자연 형상들과 같은 특별한 사물에 달라 붙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기도는 전투다. 88쪽)

- 이것은 라이베리아 정글 길을 따라 굴러 내려오는 ‘물귀신’이나 거주하고 있는 귀신이 외부인을 죽이는 것으로 알려진 불교 사찰의 경우에 있어서, 어느 정도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조명을 해준다. 실제 귀신은 수많은 다양한 인공물과 자연물뿐 아니라 동물, 우상, 놋쇠 링, 나무, 산, 빌딩 등에 달라 붙어 있다(기도는 전투다, 91쪽)

그들은 항상 필요에 의하여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한다. 계시록 17장의 음녀는 자연적인 사물에 붙은 귀신이나 물귀신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계시록에서 언급하는 음녀는 어느 특정한 여자가 아니며, 바벨론은 어느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총체적인 세력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조지 오스틴은 영적도해를 물질적인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 1990년에 나는 이러한 새로운 관찰법을 일컫는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영적도해이며 본서의 핵심주제이다. 그것은 “영적세계의 세력과 사건들에 대해 이해한 바를 물질적 세계의 장소와 환경들 위에다 표시한 것”이다(기도의 배수진을 치라, 조지 오스틴, 영적도해의 개괄, 35-36)

영적이라는 개념을 물질적인 장소에 국한시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며 마치 무속적인 신앙을 보는 것 같다. 또한 루이스 부쉬는 10/40 창문을 주장한 사람인데, 즉 10도와 40도의 직사각형 지도에 불교, 힌두교, 이스람교등이 밀접한 지역인데, 그 지역을 귀신이 다스리는 곳이므로 영적전쟁터라는 것이다.
그들이 영적도해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으로 곧 선포기도, 대적기도, 땅밟기기도가 사용되어진다.

- 대적기도, 선포기도 : 선포할 때에는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들을 이루어지도록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우리는 하나님께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해야 한다(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170쪽)

총신대 심창섭교수는 인터콥을 비판하는 ‘인터콥의 사상도해’라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한다. 아래 글은 위에서 인용한 여러개의 신사도운동의 비평과 일치된다.

- 루이스 부쉬의 10/40창문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곳 지역들이 가장 선교가 안 되고, 선교에 황무지인 것은 이 세상 신 즉 지역 악마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 복음의 서진 운동 즉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하게 될 때 전략적 선교를 수행해야 하는데 이것은 소위 21세기 운동의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전략적 영적 전쟁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다. 원래 전략적 영적 전쟁이란 피터 와그너를 중심으로 한 소위 신사도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핵심이론이다. 사단이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있어서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시지 못한 제한된 영적 피조물이기에 그의 졸개인 악령들과 더불어 세계의 중요 지역에 중심 거점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민속학에서 나오는 지역 수호신의 개념을 놓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선교는 이 이론에 있어서 세계의 중요 지역을 장악하는 지역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고 쫓아내면 되는데 이렇게 될 때 선교현장의 교회설립과 교회 성장 그리고 모든 선교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지역을 장악하는 지역 악마을 쫓아내고, 예수님의 보혈은총으로 그 지역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론으로 선교를 수행하면은 우선적으로 단기정탐 팀을 보내어 그 지역을 장악하는 악마의 정체를 규명하고, 그 지역의 교회지도자들과 연합하여 기도운동을 벌여야 한다. 지역 악마의 정체를 알아내고, 기도운동으로 악마가 추방되었다는 확신이 들게 될 때 대규모의 선교 팀을 조직하여 그 지역 전역으로 흩어져서 각종 선교사역을 수행하게 된다. 최한우씨는 21세기 운동의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전략적 영적 전쟁 개념을 전략적 단기선교라는 개념과 특정 지역에서의 평화행진이라는 이론으로 발전시켰다.(심창섭, 인터콥의 사상도해 비판)

 

성경은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전도를 할 때에 먼저 지역의 귀신을 주술적인 방법으로 쫓아낸 적이 없다.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점은 언제나 어느 지역의 귀신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과 삶의 방법을 문제삼고 있었을 뿐이며, 언제나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전도시키는 방법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와 선교는 지역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4) 땅밟기 기도

구약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한 예표적이며 상징적인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율법주의적인 주장들도 다 성경적이 될 것이다. 구약의 많은 사건들은 신약에서 모형과 예표가 되어진다.

수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성경을 모두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율법주의가 될 수도 있으며,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을 좇는 일이 되거나, 모형과 예표를 따르는 매우 이상한 해석이 될 수도 있다. 과연 기독교인이 밟는 땅은 모두 기독교인의 소유가 되는가?

본문에서 땅을 밟는 대로 소유가 된다는 의미는 장차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의 사방 최대 경계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필자는 상징적인 의미로 땅밟기 기도를 하는 것까지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혹간은 촛불기도도 이방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까지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영적도해에 의한 땅밟기 기도는 분명히 잘못된 주장이다. 땅밟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여리고성의 사건을 인용한다. 만약 여리고성을 돌았던 땅밟기가 땅의 저주를 푸는 방법이 되고, 어떤 주술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면, 왜 다른 성경과 신약에는 왜 땅밟기로 저주를 풀었던 경우가 없었는가? 만약 여리고성의 사건을 그대로 적용시키려면, 여리고성을 돌았을 때에 불었던 나팔도 함께 불어야 하고, 언약궤도 뒤에서 따라야만 하지 않는가? 또 큰 소리도 질러야 하지 않는가?

수 6:2-5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땅밟기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그 땅밟기 자체가 주술적인 효과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며 그 행위는 일회성의 상징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요즈음 어떤 목사는 나무 십자가를 땅에 묻어야만 저주가 풀린다는 주장도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는 다른 복음이며 거짓복음이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물체가 어떤 주술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하며 십자가는 예수님의 대속이 그 본질적인 의미가 되어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가 십자가 자체를 신앙적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십자가 자체가 어떤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된다. 땅에 십자가를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오히려 비기독교적인 의미가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모형적인 것이며, 그림자이며, 비성경적인 일이거나 혹은 단회적인 구약의 사건들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에 집착하게 되면 주술적이거나 무속적인 우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충분하며, 모든 저주와 권세는 예수의 이름으로 온전히 이길 수 있다.

성경적인 실제적인 사건을 살펴보자. 광야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뱀에 물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 21: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

이 사건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속사적인 사건이 된다.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의미로 비유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광야의 놋뱀의 사건을 직접 설명하셨다.

요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이 예표적인 의미를 잘못 오해하면 안된다. 이 장대에 달렸던 놋뱀 자체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이 놋으로 만든 뱀을 어떤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놋뱀은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일부는 그 놋뱀을 보관하고 있었고, 그것을 분향하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왕하 18: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느후스단’이라는 히브리어는 ‘구리로 만든’이라는 뜻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리라고 하셨고,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다. 그러나 놋뱀 자체는 구리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적 대상이 아니며, 놋뱀 자체에서 어떤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놋뱀은 상징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 본질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제외된 모형은 우상이 되어 버린다.

땅을 밟고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땅에 묻으면 땅에 저주가 풀린다는 감리교의 Y여자목사의 주장과 만든 놋뱀의 우상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땅밟기를 하면 영적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주장이 놋뱀과 무엇이 다른가? 상징적인 것까지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상징적인 것이 본질이 되면 안된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으며, 모든 저주를 풀 수 있다. 예수 외에 다른 중보자가 필요없으며, 은혜와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없으며,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이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님이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방법들은 우리 신앙에 어떤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방법이나 목적이 되지는 못한다. 예수의 이름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거나, 그 이름의 가치를 약화시킨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만약에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땅밟기를 하였기 때문에, 혹은 십자가를 묻었기 때문에, 혹은 땅밟기기도가 주술적인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인가?
더 이상 유치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무속화 시키지 말자. 제자들이 귀신을 쫓지 못하였을 때에, 제자들이 왜 귀신을 쫓지 못하였는지를 질문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은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막 9: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5) 킹덤나우(Kingdom-Now)

신사도운동의 주권 신학(도미니온)은 세 가지 기본 신념에 입각한다:

1) 사탄이 아담과 이브의 유혹을 통해 이 땅에 대한 사람의 주권(지배권)을 빼앗았다.
2) 교회는 주권을 사탄으로부터 되찾아 올 하나님의 도구이다.
3) 예수는, 교회가 지구의 정치사회적 기관들에 대한 지배를 장악하여 주권을 확립할 때까지, 재림할 수 없거나 재림하지 않는다.(Al Dager, Vengeance Is Ours: The Church In Dominion)

첫 번째 주장은 극단적인 세대주의의 이원론적인 주장이며, 두 번째 주장은 베뢰아의 주장과 같은 잘못된 교회관이다. 특히 피터 와그너는 “예수는 마귀를 멸하러 오셨다”고 주장하는 성락교회 베뢰아, 다락방의 주장과 유사하다. 더욱이 위에서 세 번째의 항목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들이 인위적인 통치적인 주권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예수는 재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아담이 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인간의 몸으로 보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그동안 존재했던 모든 인류 가운데 아담이 잃어버린 통치권을 사단으로부터 되찾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신 유일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마귀의 주된 임무는 악과 포악한 통치로 포장되어 있는데 마귀는 첫번째 아담의 타락 이후로 온 인류에게 그 폭정을 행사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같은 역사를 영원히 바꾸어 놓으시기 위하여 돌아가셨다(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82쪽)

 

- 그렇다면 예수님이 멸하시기 위해 오신 그 마귀의 일이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에덴동산 이후 사단이 인류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했던 불행과 조직적인 빈곤, 그리고 불의와 압제 들이었다. 사단의 명칭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 혹은 “이 세상 임금”은 그가 왕국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단의 호전적인 계급적 체제를 갖추어 통치한다. 이 어두움의 나라는 두 번째 아담이 오시기 전까지는 세계적인 규모로 직접적인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단은 전면적인 공격을 당하게 된 것이다.(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146쪽) 

 

신사도운동은 기독교를 종교의 영, 사탄의 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상에 세우는 하나님의 나라의 정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찾게 될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견해대로 된다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신사도운동을 지지하는 교인들에게 모두 가난의 영을 끊고 부요의 복을 부어서 그들의 돈으로 국가를 사면 될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들이 예언과 선포를 하였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미국에서 산불이 일어나 꺼지지 않을 때에 선포기도를 하니 여름에 눈이 내려 산불이 꺼졌다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적을 자신의 것으로 가장하는 종교사기꾼과 같은 주장이다. 또한 광우병은 독일에서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다. 광우병이 동물성 사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전세계에서 광우병은 거의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피터와그너는 자신이 선포기도를 하므로서 광우병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 선포할 때에는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들을 이루어지도록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우리는 하나님께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해야 한다 ...... 예를 들면 나는 광우병이 유행할 때 독일에서 공적인 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이 내게 광우병을 행하여 사도적인 선포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2,500명이 모인 앞에서 그렇게 했고, 바로 그날이 광우병이 보고된 마지막 날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내게 주어진 권세로 그 병이 멈출 것을 명령했다. 그때 그 일이 이루어졌다. (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170-171쪽)

 

그들이 선포기도를 하면 병도, 산불까지도 다 해결되었다고 함으로서 자신들을 신격화시키는 이단들의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즉 지나간 과거사에 대해서 모두 자신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공로를 주고 있다. 이들의 가장 문제점은 자신들로 하여금 악과 가난과 재앙까지도 모두 없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난의 영을 쫓아내면 부의 이동이 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그들은 종교적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딤전 6:3-5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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