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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

갈라디아서 배경

by TwoTalents 2017. 9. 13.

갈라디아서의 배경

바울은 누구인가, 누가 대적자인가


1. 서론
 
   갈라디아서는 저자가 바울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서와 더불어, 비록 축약된 짧은 서신서지만, 바울 신학의 근본을 알 수 있는 서신서이다. 특히 이신칭의라는 관점에서 복음과 믿음, 그리고 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갈라디아서 서신서에 대한 관심 중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서의 수신자가 누구이고 왜 서신서를 보내야만 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상당히 다양한 견해가 있다. 특히 갈라디아서의 수신자인 갈라디아 교회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다르다. 즉, 전통적으로는 북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라는 의견이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 학자들은 남갈라디아설을 주장하며,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더베 지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배경과 바울의 선교 사역을 바탕으로 갈라디아서를 분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많은 연구가 되어 있는 것이 바울을 비방하고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꾀는 즉, 대적자들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당연히 율법주의자로 보이고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율법주의를 떠나서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개념이 양산되었다. 대적자들의 주장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저자 바울을 먼저 탐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울이 하필 왜 아시아(소아시아)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는지와 선교하는 과정에서의 고난과 핍박을 이해함으로써 갈라디아서에서 전파하는(선포하는) 복음의 본질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 신학에 앞서 지리적 역사적 관점에서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라 여겨진다.   둘째, 북갈라디아설과 남갈라디아설의 주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려한다. 다양한 견해이기에 핵심 내용만 소개하고자 한다.   셋째, 바울을 비방하고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꾀는 대적자에 대해 살펴봄직하다. 그것은 바울이 전하였던 복음의 본질과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 특히 신율주의적 관점을 대조 비교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본고의 탐색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과 믿음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도움을 줄 것이며, 갈라디아서의 구조 분석에도 바탕이 되리라 믿는다.


2. 바울은 누구인가?
 
   바울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여러 번 나온다(행 22장,  26장,  고후 11장,  갈 1장). 이때 마다 자신의 출신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공통적인 것이 보인다. 그것은 유대인이라는 점이다(행 22:3; 26:3-5; 고후 11:22; cf. 갈 1:13-14). 단순한 유대인이라기보다는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자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다메섹 사건을 말하고 있다. 회심과 믿음을 증거하는 말이다. 


   바울은 누구이길래 이처럼 유대인이면서 이방선교에 힘을 쏟았을까? 물론 하나님의 역사이려니 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에 대한 인간적 이해 역시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어린 시절의 바울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바울 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 외, 그리스, 소아시아, 로마, 이집트 등 각지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이후 더욱 이주를 촉진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 와중에는 포로로 잡혀갔을 것이며, 평화스러운 시기에는 더 나은 문화를 찾아 이주했을 가능성이 많다.


   소아시아 지역을 당시 로마의 통치하여 있었다. 바울은 로마 시민 즉, 자유민으로 소개되고 있다. 로마 통치 시대에 유대인들은 노예 신분이었지만, 공로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유민이 되었다. 다소에 사는 바울 역시 잘 사는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유민으로 소개되고 있다.


   바울의 출생시기가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나이 그리고 선교 여행했을 때의 나이를 추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도행전 7장 58절에 보면 스데반이 순교할 때 바울을 청년으로 소개하고 있어, 청년의 나이는 24-40세임을 감안하면, 스데반의 순교 때 바울은 최소한 24세 이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갈리오가 51년 아가야 총독이 되었을 때를 중심으로 바울의 연대를 계산한다. “갈리오가 총독이 되었을 때”라고 사도행전 18:12절을 근거로 고린도 법정을 서기 전 1년 6개월 고린도에서 머물렀다고 볼 때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가 49년쯤 되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절, “십사 년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어 회심한지 14년 뒤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면, 48-49년에서 14년을 빼면 35~36년 사이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물론 갈라디아서 1장 18절 “삼 년 만에”를 14년을 별도로 계산할 때 회심을 훨씬 빨라지는 32~33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도행전 26장 10절, “예루살렘.... 권세를 얻어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라는 구절을 근거로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스데반을 죽일 때 바울은 유대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스데반이 순교했을 때 바울은 30세 이상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30년)과 바울의 회심(35-36년 혹은 32-33년) 사이에 스데반이 순교가 있었기에 따라서 바울은 예수님보다 5-8세 어린 AD 1-4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왜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갔을까? 당연히 부모의 명에 의해서 유대인다운 유대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당대에 로마 지배 하에서 오늘날 우리들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있었다면 로마로 가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간 까닭은 유대의 전통, 조상의 전통을 특히 중히 여기는 집안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만 20세 이하에 반드시 결혼해야하는 전통에 의해 결혼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가정마저 버리고 선교 여행을 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가말리엘에게 배웠고 그곳에서 공회 회원이 되었다. 가말리엘은 힐렌의 손자로 힐렌 학파를 이룬다. 바리새인 중 힐렌 학파는 실제 생활과 조화시켜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학파로, 지극히 전통적이며 타협을 불허하는 보수주의적 학파인 샴마이 학파와는 대립적인 관계였다.


   바울의 고향 : 다소


   소아시아의 역사는 다음에 다루겠지만, 후리족, 헷(히타이트)족,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통치를 거쳐 로마가 통치하는 전쟁터의 역사가 아닌 듯싶다. 다소의 이름은 탈사(Tarsa), 탈지(Tarzi), 탈수스(Tarsus)로 변화되었으며, 우리말 성경은 이곳을 다소라고 말한다. 시드누스(Cydnus)강 옆의 길리기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륙으로 약 16km지점에 있다. 지중해 연안에 접해 있으며 아다나에서 40km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8만의 소도시이다.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정벌 중 다소의 키드누스 강에서 수영을 하였다가 감기가 걸려서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다 한다. 로마시대에는 유명한 키케로가 총독으로 지 낼만큼 로마의 중요한 도시이자 상당히 큰 문화도시였다. 기원전 25년에 다소를 포함, 동부 길리기아는 행정적으로 시리아 주에 포함된다. 다소의 북쪽은 아주 높은 타우루스 산맥이 있는데 이 산맥이 북쪽과 남쪽의 공기 흐름을 막아, 여름에는 다소에 뜨거운 더위를, 겨울에는 많은 양의 비를 가져다준다. 


   다소는 교통의 요지였다. 소아시아의 동서를 연결하는 내륙도시, 지중해의 배들이 오고가는 항구도시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소아시아의 서쪽 지역으로 가기 위해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산맥 밑에 다소가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바울의 회심과 다메섹


   바울이 다메섹으로 예수 잔당을 잡으러 간다고 하였다. 다메섹은 어디이며 왜 그곳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도망갔을까? 그곳에서 바울은 회심했다. 바울의 회심은 스데반의 순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가 훗날까지도 자신의 옆구리 가시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후회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강림으로 마가의 다락방은 사도들이 예배드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되었다. 성도들이 많아지고 헬라파 크리스챤을 위해 집사 7명이 세웠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리버나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으로 여겨진다. 사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었다고 되어 있어, 유대교와의 마찰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리버디노 교회의 성도들은 몰래 숨어서 예수님을 찾는 순수한 헬라파 크리스챤들이었다. 유대인들의 반감을 샀던 이들은 주로 리버디노 교회 성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리버나노 교회의 집사 중 한 사람이 스데반이다. 스데반은 신성모독의 죄명으로 산헤드린에 끌려가 죽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 특히 리버디노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된다(행 8:1).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으러 바울은 다메섹으로 떠난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220키로나 떨어져 있는 곳으로 걸어서 꼬박 일주일 걸린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아마도 계곡 길이나 왕의 대로를 갔을 것이다. 계곡길로 갔다면 예루살렘에서 유대 광야 옆을 지나 여리고를 거쳐 요단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갈릴리 호수를 지났을 것이다. 갈릴리 호수부터 요르단으로 경로가 바뀌는데 무수한 야생생물이 서식하는 광활한 늪 언저리를 지나 골란고원에 이른다. 그곳을 지나면 가이샤라 빌립보를 지나고 하우란이라는 비옥한 평야를 거쳐 다메섹에 도착한다.


   다메섹은 안티레바논 산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동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곳으로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 지역이다. 해발 2000미터 이상 고지의 안티레바논 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흘러서 이루어진 바라다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다메섹은 고대로부터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군사적으로, 상업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에 동쪽과 서쪽에서 온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바울 시대에 이곳에서 자유롭게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며 적어도 15,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들어와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만난다. 아나니아는 그리스 전통에 의하면 다메섹(다무스쿠스) 출신으로 예수님이 선택한 70명의 제자들(눅 10:1)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스데반이 죽고 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첫 번째 주교가 되어 나중에 리시니우스 총독에 의해 체포되어 순교했다. 바울은 바로 그 아나니아를 만나 세례를 받고 눈을 다시 뜬다.


   다메섹은 이스라엘과 깊은 관계가 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나바티아 왕국의 왕 아레다(아레타스 4세)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는 정략 결혼을 했다. 그러나 곧 이혼을 하고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결혼한다. 이로 인해 유대와 나바티아 왕국은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당시 바울이 다메섹에 들어와 이 곳 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목을 받게 되고, 나바테아 왕국의 방백들이 바울을 잡아서 조사 하려 했으리라 추정된다. (제롬 머피 오코너, <바울 이야기>)


   회심 후 간 곳 아라비아는 어디인가?


   바울은 다메섹을 나와 아라비아에서 수년을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갈 1:17). 아라비아는 어디일까? 아라비아란 용어는 아랍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의미로, 나바테아 왕국(BC 6세기~AD 106년)으로 여겨진다. 바울이 활동할 당시 요르단(요단) 계곡의 동쪽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다메섹도 포함된다. 갈라디아서에는 아라비아가 또 한 번 등장한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갈 4:25)


   AD 4세기 이후에는 시내 산이 시나이 반도에 있었다고 인식했지만, 그 전에는 아카바만의 동쪽 즉, 지금의 아라비아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바울은 그와 같이 기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주로 대도시 중심의 전도 여행을 했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아라비아는 어쩌면 페트라일 가능성이 높다. 그곳은 지금 요르단의 남쪽에 있으며, 동서 도로의 요충으로 약 2만 명이 살 수 있는 지역이다. 또 한 곳을 추정할 수 있는데 그곳은 시리아의 보스라이다. 특히 제롬과 마티어가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보스라는 아라비아 주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진 곳이고 예수님의 70인 제자 가운데 디몬이 초대 주교로 있었던 곳이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무엇을 했을까? 묵상과 기도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갑자기 변화된 자신의 삶과 전도해야하는 소명에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삶의 방향을 간구했을 것이다. 또한 아라비아를 돌면서 전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도 여행의 시작인 셈이다. 


   초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로 남아 있는데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장벽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 교회라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여 이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이론을 정립하도록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인 것이다. 대략 49년에서  56년 사이의 6~7년간은 바울의 특수한 신학 사상이 형성된 시기일 뿐만 아니라, 실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신학적으로 확립된 시기이다.


3. 갈라디아 교회는 어디?


   갈라디아는 본래 오늘날의 소아시아의 북부에 잇는 앙퀴라를 중심으로 서남에서 동북으로 330km, 남에서 북으로 약 170km에 걸친 지역이다. 기원전 278~277년에 갈라디아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서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230년경에 그들의 왕국의 영토로 고정되었다. 


   기원후 25년에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갈라디아 왕국을 평화적으로 폐하고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인 주의 하나로 개편하여, 소아이사의 남부에 있는 비시디아 지방 전체와 루가오니아 지방, 브루기아 지방 및 이사우리아 지방의 일부분을 여기에 편입시켜 이 행적 구역을 일컬어 갈라디아라 했다. 따라서 갈라디아는 갈라디아 왕국을 가리키는 북부지역을 말하기도 하고 로마제국의 주에 해당하는 남부지역을 말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갈라디아서는 북부 갈라디아 교회로 보내진 서신이라고 주장하는 북갈라디아설과 남부 갈라디아 교회로 보내진 서신이라고 주장하는 남갈리다아설이 있다.


  전통적인 입장에 의하면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는 소아시아의 북부지방의 갈라디아 사람들이고,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 중 마게도냐나 아가야에서 쓴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연대 상으로 볼 때 갈라디아서는 고린도전후서를 쓴 이후, 그리고 로마서를 쓰기 이전인 AD 57~59년경에 쓰여진 서신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소위 ‘북갈라디아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20세기 전까지 가장 보편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1890년쯤에 람세이(Wm. M. Ramsay)가 등장하면서 고전적인 북갈라디아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람세이는 전통적인 입장에 반대하면서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들이 북갈라디아 지방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때에 선교하였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과 같은 남부갈라디아 지역의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를 ‘남갈라디아설’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견해이다. 이 때에 기록한 서신이라면 49년경에 썼을 것이다.


   1865년 라이트푸트는 북갈라디아설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 바울과 누가 양자 모두 사람이나 지역을 가리킬 때 보통 대중적, 지리적, 그리고 인종적 언어를 사용하였다.
   ② 갈라디아서 2:1~10에 나오는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바울의 기록은 사도행정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누가의 묘사와 관련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③ 사도행전 16:6과 18:23은 바울의 두 차례의 갈라디아 방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 남부 갈라디아의 도시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④ 갈라디아서 4:13에 나오는 두 차례의 방문에 대한 바울의 언급(토 프로테론, 이전에)은 사도행전 16:6과 18:23에 암시된 상황과 잘 조화를 이룬다.
   ⑤ 부르기아와 루가오니아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적으로가 아니라 단지 로마 치하에서 정치적으로 갈라디아인일 뿐인데 바울이 그들의 충성을 되찾으려는 시도 하에 그들을 갈라다이인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⑥ 고대의 여러 저자가 고올인들을 변덕스럽고 미신적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또한 바울이 그 수신자들을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다.
   ⑦ 갈라디아서의 문체와 주제는 바울의 제3차 선교 여행 중에 기록된 서신들, 특히 고린도후서의 논조와 로마서의 내용과 매우 잘 어울린다. 


   남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람세이는 1890년에 이후에 “그 사람들의 역사와 특성, 그리고 그 지역의 지리”에 초점을 맞추는 일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① “일찍이 주전 2세기에 [소아시아 북부] 갈라디아 인구의 절반 이상인 브루기아의 기원은 주변 지역의 일반인들에 의해 잊혀 졌으며, 그 나라 전체가 갈라디아로 그 백성은 갈라디아인으로 생각되었다.
   ② 갈라디아가 넓어지고 주전 25년 성이 되었을 때, 이것은 그 남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모든 비로마인은 성민(provincial)으로서의 신분이었으며, 그는 그 민족이 아니라 성에 따라 로마 제국의 구성원이라 부르게 됐기 때문이다.
   ③ 외국인, 적, 그리고 노예는 로마의 이론상 서로 연관된 개념들이었기 때문에, 정중한 웅변가나 작가 어느 누구도 안디옥인을 브루기아인이라 또는 루스드라인을 루기오니아인이라 호칭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④ 따라서 갈라디아서 2:1~10에 나오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그 목적이 완전히 다르며 그 묘사가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에,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와 관련이 없고, 사도행전 11:30의 기근 방문과 동일시된다.
   ⑤ 바울은 로마인과 그 제국의 시민으로서 서신을 쓰며, 따라서 그는 모든 서신에서 로마의 성들의 명칭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지리적 명칭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4. 바울의 대적자는 누구인가?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주의자들이 존재했을 것이며, 혹은 유대주의자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였음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1:6~7). 갈라디아 교회 상황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거짓 형제 즉, 유대주의자 지도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음을 또한 말하고 있으면서(2:4) 또한 예루살렘 방문을 언급한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를 시사하는 바울의 변증이다. 이는 외부로부터 유입된 유대화에 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교회는 방종주의 위협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5:13절 이하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의 방종을 권면하고 있다. 이는 이방인이나, 할례를 하지 않은 디아스포라들의 방종된 생활 모습으로 여겨지며, 초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울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유대화 신학에 맞서는 한편, 자생적으로 생긴 방종주의의 위협에 경종을 울릴 필요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적자가 누구인가”라는 관점의 연구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대적자와 그들의 메시지를 찾는 것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대적자와 그들의 메시지는 오로지 서신 자체로부터 찾아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그러한 방법은 항상 어렵고 위험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바울의 대적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 유대주의자들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때 그 견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견해는 다양해진다.


   바울 신학의 현대 시기를 시작시킨 바우어는 1831년 원시 기독교는 두 경쟁 분파로 이루었음을 전제로, 그리스도파를 포함한 베드로 분파와 아볼로파와 연합된 바울 분파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베드로 분파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지지하였으며 후에 로마에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세웠다. 이들은 이방 선교를 옹호하는 바울의 주장들에 감히 반대하지는 못하고, 다소 마지못해 그의 독자성을 인정한 것으로 하였다. 따라서 바우어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대적자는 예루살렘에서 온 엄격한 유대적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있다. 


   1865년 라이트 푸트는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과 상호 인정과 용납의 관계 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갈라디아에 왜곡된 복음을 가져온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왔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주장이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갈라디아 문제 이해에서 결정적 전환점은 1919년 빌헬름 뤼트게르트와 1929년 제임스 히디 로웁스의 “두 전선 이론”에서 비롯된다. 한 부류는 유대주의적 분파와 영적 급진주의자들인 성령주의적 분파이다. 전자는 유대적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면, 후자는 바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1:1~5:12에서는 유대주의자들에 맞서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동등성과 유대교의 전통에 대한 비난의 내용이었다면 5:13~6:10에서는 성령주의자들에 맞서 윤리적 무절제에 대한 비난의 내용으로 보고 있다. 이들 두 분파는 유대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제안하였다. 즉, 영적 급진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며, 유대주의자들조차도 기독교 신앙의 히브리적 요소에 매혹된 이방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945년 크라운 필드는 대적자들이 혼합주의적 태도를 지녔다고 보고 있다. 즉, 할례를 비롯한 다양한 유대적 의식을 강조하는 유대교 신비주의 종파적 배경을 가졌고,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러한 유대교 의식과 윤리적 방종과의 혼합된 의식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의 독립성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윤리적 요청을 강조해야 했다고 보고 있다.


   이외에도 구원사적 측면에서 예루살렘 사도와 바울과의 견해차를 설명한 요하네스 문크의 연구, 유대그리스도인 영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대적자를 설명한 발터 슈미탈스, 열심당이 대적자라는 로버트 제웨트 등이 연구들이 있다. 


   대체적으로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대적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방종주의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아무래도 신율주의의 유입으로 인해 제기된 질문에 대한 권면으로 보인다. 신율주의 최근에 등장한 용어로 언약적 신율주의를 지칭하며, 샌더슨이 제시한 새 관점의 학설이다. 즉, 신율주의는 유대교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을 중시하고 율법 준수(nomism)를 언약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는 언약적 종교임을 뜻한다. 주전 주후 유대 문헌을 분석한 결과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언약 백성이 되며, 율법 준수란 단지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상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발견한다. 율법 준수가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언약 안에 머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율법 준수는 신율주의적 관점이며,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방종으로 이어짐을 바울이 지적한 것이다. 5:14에서 사랑이 율법을 대치함을 설명하고 있으며 5:23에서는 율법으로 성령의 열매가 작동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대적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유대주의자들의 신율주의적 관점에 젖어든 이방인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따라서 대적자들이 누구인지를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복음을 변하게 하는 유대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방종에 대해 신율주의적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무리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5. 결 론

   본고에서는 자자 바울에 대해 살펴보고, 수신자인 갈라디아 교회가 어디인지를 알아본 다음,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철저한 유대주의자인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역사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디아스포라인 바울의 어린 시절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삶을 알게 되었고, 그 역사적 배경 속에 있는 갈라디아 교회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갈라디아 지역은 많은 제국들의 지배하에 있었고, 당대는 로마의 지방의 주인 갈라디아 주로 이름 지어져 다스려졌다. 그곳에 사는 민족 역시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민족과 그 지방의 토속 민족이 섞여 있음을 역사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삶 역시 짐작할 수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복음과 대치되는 대적자들이 존재함을 살펴보았다. 대적자들에 바울은 비난과 권면을 제시한 서신이기에 서신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대적자들의 속성을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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