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공존할 수 없다.
본문 : 요한일서 2:12-17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 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씀 :
요한은 이제까지 빛이신 하나님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내가 빛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요한은 빛이신 하나님을 전하며 앞으로 어둠을 빛이 밝히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미래적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빛은 이미 어둠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
예수님의 사역과 그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어둠을 물리치심, 죄와 사망 권세에서 승리하심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믿음의 사람들이 빛 안에 거하는 것은, 이미 비추고 계신 빛 안에, 죽음을 이기신 승리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승리 안에 거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 방법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을 좀 더 전투적이고 적극적으로 가르친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2~14절, 15~17절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단락인 12~14절에는 수신자의 칭호가 세종류로 나타난다.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 그것이다.
14절의 ‘아이들’은 12절의 ‘자녀들’과 같은 의미로 보면 된다.
오늘 본문은 요한이 호칭하고 있는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이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학자에 따라 크게 4가지 견해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영적 성장의 단계로 보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의 믿음이 어린아이에서 아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육체적 나이 구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아이들, 장년들, 청년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수신자를 다른 방식으로 세 번 불렀다는 견해도 있다.
호칭만 달리할 뿐 믿음과 관련된 부분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견해는 믿음이 성장하는 각각의 단계가 아니라 일반적인 것을 나누어서 말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첫 호칭과 나머지 두 호칭을 구분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녀들’은 수신자 전체를 부르는 것이고, 그 안에 믿음의 성숙도에 따라 ‘아비들’과 ‘청년들’로 구분해서 불렀다는 견해이다.
4가지 견해 모두 나름에 타당성이 있다.
오늘은 이 부분을 믿음 성장의 과정, 신앙 성숙의 각 단계로 보고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먼저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본문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본문은 믿음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본문 14절 상반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믿음의 사람들은 제일 처음에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죄 사람을 받고, 구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 곧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7장 3절과 본문 14절 모두 같은 단어인 ‘기노스코’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은 주님을 아는 것으로 믿음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주님을 아는 것으로 죄 사함을 받고, 그 앎이 영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을 알고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주님을 알고 죄 사함을 받았다면, 그 뒤에는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본문 13절 상반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이라는 표현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이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에 의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여전히 아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주님을 아는 것으로, 믿음이 시작되고 죄 사함을 받은 성도가 끊임없이 주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알아갔던 것이다.
그것으로 아이에서 아비로까지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면서 믿음이 성장하고 자라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생으로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성장하는 믿음의 여정 가운데에는 세상의 공격이 있음을 전한다.
본문 13장 하반절.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본문의 청년은 아이와 같이 어린 신앙에서 아비와 같은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성도를 의미한다.
그들을 향해 악한 자의 공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그 영적 전쟁에서 청년들이 이겼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의 ‘악한 자’는 계속해서 나를 넘어트리고, 사망으로 인도하려는 사탄의 세력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어떻게 악한 자를 이길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셨기 때문이다.
본문 14절 하반절.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본문의 ‘이기었음이라’는 헬라어로 ‘네니케카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완료형이다.
그러니깐 이미 ‘이겼다’라는 말이다.
이미 악한 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말이다.
이 승리의 근거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 이미 악한 자를 이기셨다.
주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셨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로 승리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승리에 제대로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
주님의 승리에 제대로 참여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나로하여금 이미 승리한 전쟁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도록 하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요한은 가장 먼저 세상을 향한 사랑을 끊으라고 말한다.
본문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본문의 ‘세상’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세계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세상은 악한 자의 권세 아래 있는 타락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악한 자의 지배를 받으며 나타나는 타락한 본성, 그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잘못된 삶의 방식, 잘못된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이룬 조직 등등 세상의 타락한 모든 것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는 이런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고, 선과 악이 함께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타락한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지 않는 것이라고 확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도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욕’은 그 자체로 선이나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본능에 가까운 정욕이 왜곡된 방향으로 잘못 사용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해 대상과 방식, 목적이 잘못되었기에 나쁜 것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그것들과 관련된 대표적인 것으로 표현한다면…
돈, 섹스,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돈과 섹스, 그리고 권력이, 그것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돈이 나쁜 것인가?
돈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쁘고의 개념이 아니다.
돈은 편리를 위해 탄생한 것이고, 공동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돈을 너무 많이 가지려고 하고, 그래서 불의한 방법으로 벌고, 그리고 그 돈이 잘못 사용하고, 돈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죽기도 하니깐 잘못된 것이다.
성은 거룩하고 고귀한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성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다.
욕정을 위해 성의 기본 질서마저 파괴되고 있다.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한다.
그러니깐 죄악인 것이다.
권력은 사회 질서나, 조직의 질서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단체가 아닌 개인을 위해 권력이 사용되고 있다.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오히려 법질서가 무너트린다.
사회 질서가 파괴하면서 의인을 죽이고 악인을 높이고 있다.
그러니깐 씻을 수 없는 범죄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원함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악한 자의 권세 아래, 타락한 본성, 타락한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절제하지 못한 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는 사악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선포한다.
악한 세상은 반드시 끝이 날 것이다.
그 마지막 끝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기억하여야 한다.
본문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는 자.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다.
말씀 마무리…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
그런데 그러면서 바알도 섬겼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바알로부터 풍요의 복도 받고 싶었던 욕심으로 가득 찼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을 모두 하고 싶어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육신의 원함도 이루고 싶어 한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지만, 이 땅에서의 성공도 하고 싶다.
그냥 하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육신의 원함을 이루고, 이 땅에서 성공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이루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며 주님께 영광 돌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그 입을 막고 싶으실 것이다.
이런 자들을 향해 요한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를 따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시에 내 안에 있을 수 없다는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
오늘 주께서 우리의 영혼을 만지시길 간절기 기도드린다.
우리가 말씀으로 결단하게 하시고, 주님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이 세상도 지나갈 것이고, 모든 정욕도 지나갈 것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으며,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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