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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2 애굽 탈출기(출애굽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출애굽기 1:1~7)

by TwoTalents 2023. 2. 17.

제목 :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본문 : 출애굽기 1:1~7

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 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 라

 

말씀 :

요즘 우리나라는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사이의 한국에서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과연 미래는 지금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그래서 오후에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문 아무개란 사람을 있었다.

그는 20146월 초에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같은 달 11KBS의 보도 때문에 총리 후보 사퇴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고, 624일에 후보직을 자진 사퇴 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2012년도에 있었던 온누리교회의 여전도회 세미나에서의 강연 내용이다.

그때 그는 대한민국 역사를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켜서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결국 총리 후보직을 사퇴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당시 그의 발언에 대해서 옹호하는 몇몇 정치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마치 문 아무개의 발언이 맞는 것처럼, 기독교의 역사관이 그런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먼저 문 아무개의 온누리교회 강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간증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앙적 차원에서 나온 말이라며 별문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문 아무개가 온누리교회에서 했던 강연은 말 그대로 강연이지 간증이 아니다.

여전도회 세미나에 문 씨가 초대받아 강연을 한 것이다.

내용에서도 간증일 수가 없다.

신앙 간증은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그 사실을 은혜로 믿고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근데 문 씨는 그런 내용의 간증을 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한국 근대사를 설명하고, 그것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것은 앞서 밝혔듯이 명백하게 초청받아 행했던 강연이다.

 

당시 강연을 살펴보면 문 씨가 여러 가지 희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유심히 들어야 할 부분은 자신이 언급했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발언이 하나님께서 일본을 들어 사용하셔서 우리나라를 40여 년간 지배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한국이 근대화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6.25를 일으키셔서 미국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돕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가 미국과 동맹국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보호 아래 잘 발전하면서 살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 외에도 개그콘서트 대본에서도 볼 수 없을 말을 많이 했다.

위안부에 대한 발언이나, 게으르고 지저분한 대한민국의 국민성에 대한 발언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문씨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비교한 대상이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고난을 주고 망하게 하고, 그러다가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구약의 역사를 제시한 것이다.

봐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고난을 주시고, 점령당하게 하셔서 훈련하신 것 아니냐.’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지금 많은 위인을 배출하고 잘사는 것 아니냐.’

이런 주장이다.

그러면서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나 6.25와 같은 비극이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한국을 연단시키셨다고 주장한다.

문씨의 이 말은 그냥 흘려들으면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성경 들먹이고, 이스라엘 들먹이고 하니깐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꼭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끔 성경의 인물이나, 혹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 등을 지금의 나에게, 나의 처지에 빗대어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는 설교를 그런 식으로 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그럼 문씨의 말은 문제 될 것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씨의 발언은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엄청난 오류가 있다.

오늘 본문 내용이 무엇인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될 바로 전 단계의 내용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점점 구체화 되는 과정에 놓여있다.

가나안 땅에서 가족끼리 살고 있었던 야곱의 무리가 총리가 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의 도움으로 가뭄을 피해 애굽의 고센 땅에서 머물게 된 것이다.

본문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야곱의 가족은 애굽에서 70명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풍성한 애굽 땅에서 그 수가 점점 많아지게 된다.

계속해서 본문 6, 7절을 읽어보겠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통해 동일하게 약속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나는가?

바로 그 씨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창궐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씨를 통해 많은 민족과 많은 왕들이 일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개인을 선택하셨지만, 그 선택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민족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 민족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의 장자 민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선택된 민족인 것이다.

그리고 그 민족 안에서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다.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은 특별히 더 관리되고, 보살펴져야 했으며, 훈련되어야 하는 민족이었다.

 

문씨의 가장 큰 오류는 이런 특별한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아예 일반화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행하셨던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권한 안에서, 특별한 인도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모든 민족을 향한 모델인 양 한국의 근대사에까지 끼워 맞춘 것이다.

한 교회의 장로라는 사람이 가장 기본이 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도 않고 아무 곳에나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문 씨 말고도 많은 분들이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마치 다윗의 상황이 나의 상황인 것처럼, 욥의 고난이 나의 고난인 것처럼 그렇게 결부시키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다.

감동 줄려고, 이런 식으로 무리하게 설교하는 안타까운 목회자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바른 모습이 아니다.

분명히 다윗을 참고할 수 있고, 욥을 참고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다윗이 내가 될 수 없고, 욥이 나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사자를 베게 삼아 잠을 잤다고 해서, 이것이 믿는 자를 향한 일반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럼 우리도 동물원에서 사자를 베고 잠을 잘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만에 육지로 나왔다.

이것이 일반적인것이라면, 믿는 사람 중에서는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성경의 기사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나타내기 위해서, 선택받았던 몇몇 사람들의 특별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기하고 놀라운 이적 하나하나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그 기사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봐야 하는 것이다.

 

신약에는 오병이어와 비슷한 칠병이어기적이 마가복음 8에 등장한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그 이적 자체를 신기해할 뿐이다.

그리고 배고픈데 먹을 것을 주니깐 그 사실에 기뻐한다.

그런 잘못된 관점으로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던 것이다.

문씨는 이와 똑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결단코 성경 속의 역사가 일반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역사에, 그것이 민족이든, 개인이든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명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임을 믿고 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 가운데 있다고 믿는 것이 신앙적인 관점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우연에서 비롯된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역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신다는 관점은 보통의 세상적 관점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인 관점이다

이 관점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준다.

만일 이 세상이 아무런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우연으로 인한 결과로 빚어진 것이라면...

과연 우리가 미래에 대하여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그러면 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 법과 질서는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조금의 의식이 있다는 것 외에는 동물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세심하게 섭리하며 통치하신다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인생에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와 악의 문제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상당한 골칫거리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것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죄악에 대한 최종적인 결재권자가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더 이상 완전하게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이 세상의 죄악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선이 악을 이긴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하겠는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대답을 모두 내놓고 있다.

,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악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으며, 악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답이다.

 

욥에게 일어났던 고통도 하나님의 허용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

애굽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와 동시에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은 결코 선한 일이 아니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결과적으로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룟 유다는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도둑을 맞게 된다면 문단속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도둑이 들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를 할 것이다.

그래서 더 큰 재난을 미리 방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둑질한 도둑에게 방범에 대한 공로로 상을 주지는 않는다.

 

어떤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고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날 그 가정에 강도가 들었다.

남편은 아내를 보호하면서 강도와 맞섰고, 아내는 남편을 도와 함께 강도를 때려잡았다.

그 덕분에 이 부부는 다시 서로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강도의 행위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인가?

 

앞에서 말한 문씨의 주장처럼, 일제 36년의 통치의 결과로 어느 정도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개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제의 식민 통치가 우리 민족에게 좋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제 36년 동안의 비인간적이고 악랄한 통치 속에서, 그 기간 안에 우리나라의 진보된 모습이 있다고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해버리는 죄를 짓곤 한다.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의 유익을 위해 악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그동안 시무하던 교회를 떠나 더 큰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치자.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시킬 것이다.

이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옮기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함부로 단언할 수도 없다.

때로는 그러한 움직임에 자신의 악하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아주 많이 있다.

하나님의 필요가 아니라, 나의 필요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목회자들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뜻이 경홀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함부로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사랑을 나의 욕심을 채우고, 내 죄악을 감추는 것에 이용하는 악행을 결단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말씀 마무리.

우리는 3차원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각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려니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인간의 삶은 미래라는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시간 위에 입체적으로 계시는 분이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에 악이 존재하느냐가 궁금한가?

아주 중요한 질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하게 마무리될 것임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대한 기대가 어떠하냐에 따라 인간은 대부분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신 모습은 마지막 날을 이루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

그 믿음으로 결국 이루실 주님의 뜻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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