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Talents 2020. 6. 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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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율법과 약속.

 

본문 : 갈라디아서 3:15~22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말씀 :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이신칭의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칭의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 언약, 유업이었음을 강조하며 성경적 개념으로 설명하려 한다.

지금까지 율법과 믿음, 율법과 성령을 대조하였는데 본문에서는 율법과 약속을 대조하고 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이렇게 전한다.

본문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바울은 먼저 사람의 일상생활 속의 일을 예로 들어 논증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제시한 것이 사람의 언약이다.

언약은 계약, 약속, 제정, 유언 등등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본문에서는 대체적으로 유언적 성격으로 본다.

그런데 유언이 죽음과 연관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유언과 결부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하나님께서 죽으실 일은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유언이 언제 작성되는 지가 핵심이 아니다.

유언의 성격에 중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니깐 죽음을 앞둔 사람이 유언을 남기는 그때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언이라는 것은 작성되고 공증까지 받게 되면, 작성한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경우도 유언의 내용을 바꿀 수 없는데, 그것이 핵심이다.

그러니깐 바울은 사람의 유언도 그것이 정해진 뒤에는 아무도 무효라고 할수 없고, 첨부하거나 빼는 것으로 빠꿀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하겠는가?

본문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본문의 이 약속은 창세기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말한다.

창세기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씨, 즉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었다.

그런데 이 약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씨들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2218절의 는 히브리어로 제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언어학자에 따라 제라라는 단어자체가 복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단수로 씨들이 아니라 라고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자손들이 아닌, 자손들 중 한사람의 자손,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다.

 

바울은 약속이 율법보다 먼저 주어졌음을 증거한다.

본문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아브라함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 보다 430년이나 먼저 주어졌다는 것이다.

430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430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430여 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율법이전에 약속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언을 그 무엇로도 폐하지 못하듯이,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율법으로 폐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율법이 약속을 대체하기 위해 주어진 것도 아니다.

뒤에 율법의 의미를 다시 나누겠지만, 율법위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문서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이 율법이 아닌 약속에 의한 것임을 한번 더 밝힌다.

본문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만약 이스라엘의 유업이 율법에 의해 주어진 것이면 약속에 의한 것이 아니게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거짓말 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유업은 약속을 통해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업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문의 유업은 헬라어로 클레로노미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상속권, 세습재산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유업이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으로 아브라함때부터 시작하여 자신들에게 상속되어진 것을 말한다.

그 상속이라는 것은 바로 이다.

창세기 2217, 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런데 이 유업, 즉 복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시각과 바울의 깨달음이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복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가장 작은 민족 중 하나였던 자신들이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고, 강력한 나라가 되는 것이고, 백성 모두가 떵떵거리며 잘사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유업은 미래적 관점에서의 구원, 영적 구원을 참된 복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렇게 유업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보니깐 율법을 바라보는 시각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은 율법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본문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첫 번째로 율법은 사람이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다.

그러니깐 죄와 관련된 것이라는 말이다.

율법은 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없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두 번째로 율법은 간접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바로 주신 것이 아니다.

천사를 통하였고 한 중보자, 바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직통으로 주신 약속보다 하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율법은 한시적이다.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오직 약속하신 자손, 즉 메시아가 오시기 전까지만 그역할을 감당할 뿐이다.

메시아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유업이 온전하게 이루어질때까지 계속해서 유지 될 것이다.

 

바울은 율법의 한계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본문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0절은 앞뒤를 살펴보아도 상당히 뜬금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로 통한다.

20절에 관련된 해석만 하더라도 300여 종류가 있다.

저는 20절을 율법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본다.

앞서 19절에서 율법이 천사를 통해 한 중보자에게 주어졌다고 말하였다.

20절의 나타난 중보자가 19절의 중보자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를 의미한다.

이 모세가 한 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깐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그 율법을 받아서 지켜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 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받은 이스라엘이 지키고 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지만, 지키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율법으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약속은 다르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실행하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의 약속으로 그저 주어지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하나님의 실행만이 있을 뿐이고, 인간은 아무런 공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애초에 필요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인가?

절대 그럴수 없다.

본문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율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부정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단지 율법의 역할이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어떻게 해서라도 지킬 수 있는 율법들이 주어졌다면, 인간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인되고 생명을 얻고, 천국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서도 율법은 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인간의 죄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본문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죄는 전염성이 있다.

죄를 짓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점염되고 죄를 짓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전염 될뿐만 아니라 확장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율법은 그 죄를 드러내기 위해 같이 확장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본문의 성경은 율법과 동의어이다.

바로 율법이 인간의 모든 죄를 드러내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이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아주 작은 죄라도 저지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구원 받기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메시아를 보내신다고 하셨다.

그 보내신 이가 예수그리시도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계속해서 율법의 의미와 그 한계를 전하고 있다.

율법을 믿음, 성령, 그리고 약속과 대조하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율법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왜 이러고 있는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율법주의, 형식주의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 때문에, 형식 때문에 믿음을 다 잃어버리고 사망으로 달음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돌이키려고 하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 형식이라는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시대와 장소, 상황과 사람에 따라 똑같을 수 없고, 다르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보편적 진리일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다르다.

약속은 어느시대, 어느 장소, 누구에게라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언제라도, 누구라도,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라고 칭함 받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 하셨다.

이 약속이 우리의 유업이고, 이 약속이 믿음으로 주님을 고백할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 저의 목회자로서 사명중 하나가 율법주의, 형식주의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런 비전을 주셨다.

무분별한 자유가 아니라, 책임있게 행동하는 믿음을 전하는 것이 일생의 사명으로 받아드렸다.

율법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식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이다.

주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주님의 약속을 실천하는 믿음, 주님의 그 이름을 믿는 믿음.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시고, 믿음이 우리를 살린다.

 

오늘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우리 영혼에 온전히 각인 될수 있기를 기도한다.

말씀의 깨달음이 우리에게 주님의 약속을 의지할 수 있게 하기를 기도한다.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한마음 신앙공동체 모두가 약속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설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